지난 목요일 오후 수원역 앞에서 세무사 사무실을 운영중인 친구를 만나기 위해 수원역앞 이쪽편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저쪽편 사무실로 가기위해 역앞 보도를 걷던 내 앞을 중년의 깔끔한 여자분이 길을 막아선다.
그러면서 나에게 뭐라 &%*#@^%$ 말을 했는데 알아듣질 못했다.
그냥 지나치려는데 다시 막아서며

"큰 일을 할 분이신데 풀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네?"
"조상님들이 선생님에게 꽤 공덕을 들였는데 왜 모른척 합니까?"
"뭔 소리 입니까?"
"조상님들의 기대가 무척 큽니다."
"왜 남의 말은 듣지 않습니까?", "남에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아 고생하시는군요."
"뭐 하시는 분이신가요?"
"도를 닦는 사람입니다. 선생님은 오늘 기인(奇人)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뭔 볼 일이 있습니까?
"수련중에 있으니 10분만 저의 말을 들어 주세요.."
"볼 일이 있어 가는 길이니 곤란합니다."
"선생님을 위해서 드리는 말씀 입니다."
"저의 말을 10분만 들어보시면 고생없이 큰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왜 고생하십니까?"

"허허~~~~벌써 10분 다 된 것 같습니다. 큰 일에 관심 없습니다."
"조상님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마세요.", "제 말을 들어 보시면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가려던 나를 계속 막아서며 10분만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고 간청한다.

"좋습니다. 다른 의도나 조건이 있다면 듣지 않겠습니다." 라고 응하니
"저기서 커피 한 잔만 사 주세요."

바로 옆 수원역사 1층에 있는 커피 전문점으로 이동했다.

역사로비 벤치에 자리하는데 왠 여자 한 분이 나타났다.
"누구십니까?"
"같이 온 사람 입니다."
아마 주변에 있었던 모양이다.
커피 잔을 들고 자리잡으니 슬며시 나타난다.

이후부터 처음 나를 유혹했던 여자는 침묵하고 나중에 등장한 여자가 말문을 연다.

그리고 메모지를 꺼내들고 묻는다. 생년월일 이다.
마치, 사주 보는 느낌이다.
그러나 앞서 여자분이 하던 비슷한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조상제사, 칠성당, 성황당, 사주팔자, 조상 묘자리, 풍수지리, 무당 푸닥거리 등등 메모을 그려가며 계속 이야기 한다. 
그러나 메모하는 것은 별 내용이 없어 보인다. 눈여겨 볼만한 그림도 아니다.

한참 이야기중 기억에 남는 꿈 이야기를 해보라고 한다.

"기억에 남는 꿈이 없답니다. 꿈자리에 그리 신경 쓰지 않습니다."
꿈에 대해 나의 대꾸가 없으니 앞서 유사한 이야기가 반복된다.
조상얘기도 들먹인다. 조상이 잘되야 후손이 길하다는 내용이다.
"자! 이제 정리합시다." 라고 하니 다시 꿈에서 본 동물 이라든가 기타 등등 본 것을 이야기 해보라고 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꿈 같은 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토정비결도 보지 않습니다. 신문에 나오는 오늘에 운세를 재미삼아 보는 정도 입니다." 라고 하니 앞서 이야기에 표현만 다를 뿐 또 반복되는 이야기가 계속된다.

그러는 동안  커피전문점 코너의 젊은 아가씨가 이쪽을 힐끔 바라보며 입가에 웃음을 띈다.

그 아가씨 속으로 "저 아저씨 일단 삐기에게 걸렸는데 결과가 사뭇 궁금하다"는 표정이다.
이제 분위기 파악이 다되었다.

"약속한 10분이 지났습니다. 지금 같은 얘기가 반복됩니다. 마무리 합시다. 아니면 일어섭니다." 라고하자

"조상님을 위해 기도하세요" 라고 하기에 "저는 평소 이웃 잘되라고 항상 기도 합니다."
"아니 조상님을 위해 기도 하셔야죠."
"알겠습니다. 앞으로 조상님 포함하여 기도 하렵니다."
"지금이 기도할 때 입니다."
"지금 당장이요?"
"네, 지금 기도하셔야 합니다."
"아니요, 앞으로 더욱 열심히 기도 하겠습니다."
"지금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이제부터 큰 일을 하시게 됩니다. 조상님들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앞으로 자주하겠습니다. 제가 자주 기도드리면 조상님들께서 감동 받으시고 돌봐 주시겠죠."  "자! 충분히 말씀들어 드렸고, 같은 이야기만 반복되고 끝맺음이 없으니  그만 합시다." 하며 자리를 일어섰다.

끝맺음이 없는 건 아니다.

지금 당장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 끝맺음 아닌가? 그들이 구체적인 말을 머뭇거린 것 뿐이다.
다소간의 궁금증에 응했으나 이제 본색이 드러난 것 아닌가?
저사람들이 공연히 길거리에서 저런 짓 하는 것이 아니련만.... 참 나두....
괜한 짓 했다, 커피 두 잔 값이 아깝다 생각하며 발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친구 사무실에 당도하여 방금 역전 앞에서의 상황을 이야기 했다.

친구 사무실은 수원역전 건너편 빌딩의 7층이라 역 앞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친구가 창문밖 역전 앞을 가리키며 "저기 저 사람들도 같은 사람들일세.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몇팀이 그러는 것 같아."

그 사람들에게 걸리면 근방 어디로 데려가 조상님께 기도드린답시고 부적과 상 차릴 명복으로 돈을 요구하는데 최하 10만원짜리 부터 상차림이 있다고 들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가 말 못하는 고민은 가지고 있다.

부부문제, 자녀문제, 사업문제, 직장문제, 친구간에 문제, 애정문제, 병환문제, 각종 사건사고  등등 많은 고민, 고통을 않고 있다.  그사람들은 상대방 나이, 성별에 따라 적당히 들먹거리며 모든 원인을 조상님께 돌린다.

해결 방안으로 조상님을 섬기라는 것이다. 그 방편이 무당굿과 유사한 것 아니겠는가?

역전 앞의 그분들도 꿈자리 이야기를 집요하게 물었는데 내가 전혀 내놓는 꿈이야기가 없으니
자신들의 의도에 걸려들지 않아 유사한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늘어 놓은 것 같다.

친구와 술 한 잔 하고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이야기 했더니

아내 왈 "그여자에게 관심 있던거 아냐?" 라고 한다.
속으로 "그랬던가 보다. 뒤에서 다른 여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인생은 등산길과 같다.

오르고 내리는 길의 연속이다.
땀 흘리며 정상에 올라 바라보는 넓은 세상, 경치에 시름잊고 쾌감을 만끽할 수 있다.

인생은 일종의 장애물 경주와 같다.

지금 이자리 까지 얼마나 많은 장애물을 헤치고 왔는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경주이다.
한세상 살다보면 무수한 장애물이 있다.
참고 견디며 살아가는 세상이기에 삶의 묘미가 있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된다면 좋으련만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법정스님은 "산에는 꽃이 피네"에서 보왕삼매론을 풀어 설명하셨다.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병고로서 양약을 삼으라.  몸이 건강할 때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을 병을 앓을 때 생각해 보라.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인생수업"에서 말한다.

"生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하라."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보자.


수원역전 앞을 지나는 분들이여!

솔깃한 몇마디에 현혹되지 말지어다.
당신의 약한 마음을 교묘히 파고든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상대도 하지 말지어다.


황소생각의 하늘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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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남도여행 포스트 10, 최종)

옛것은 아름답다. 순천 낙안읍성

법정스님'아름다운 마무리'에서 "오래된 것은 아름답다. 거기에는 세월의 흔적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그 흔적에서 지난날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그렇다. 옛것에는 향기가 배어있다. 숨결이 있다. 선조들의 지혜가 있다. 세월의 풍파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기에 옛것에는 정감이 있다.

이번 남도여행 마지막 코스로 옛것의 아름다움을 찾아 순천 "낙안읍성"을 다녀왔다.
지난 법정스님 다비식때 순천시내를 지나치며 낙안읍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후에 검색해 본 후, 기회보아 가보려던 참에 이번 남도여정에 포함하여 다녀오게 되었다.

낙안읍성은 대개의 성곽이 산이나 해안에 축조되었는데 반해, 들 가운데 축조된 야성(野城)으로 외탁(外托)과 내탁(內托)의 양면이 석축으로 쌓여 있는 협축(夾築)으로 이루어졌다는 큰 특징이 있다.

낙안읍성은 조선 태조 6년(1397년)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양혜공(襄惠公)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고 왜구를 토벌하였고. 그 후 인조 4년(1626년 5월 ∼ 1628년 3월) 낙안 군수로 부임한 충민공(忠愍公)임경업(林慶業) 군수가  석성(石城)으로 개축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9년(1426) 되던 해에 석성으로 증축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 설이 있다.

성곽의 길이는 1,410m, 높이 4∼5m, 넓이 2∼3m로서 면적 41,018평으로 성곽을 따라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었으나 현재, 동문은 낙풍루(樂豊樓), 남문은 쌍청루(雙淸樓) 또는 진남루(鎭南樓)라고 하고 서문은 낙추문(樂秋門)으로서 성문 정면으로 ㄷ자형 옹성(瓮城)이 성문을 애워 감싸고 있다.

낙안읍성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조선시대 지방계획도시로서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현재도 농악놀이, 큰줄다리기, 따니치기, 목가치기, 횃불놀이, 달집태우기, 디딜방아훔쳐오기, 윷놀이, 사명덕석기, 씨름, 들돌들기 등 다양한 민속놀이를 즐길 수 있고 많은 설화와 전설도 간직하고 있다. 


낙안읍성의 민속마을은 실제 주민이 거주하며 옛것을 보존하고 있다.  또한 그곳에서  민박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방문후에 알았다. 다음에 다시 남도여행길에 오른다면 낙안읍성에서 민박하며 여러가지 민속놀이를 즐겨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순천만 갈대밭을 포함하면 금상첨화 이렸다.

     


낙안읍성 안내도
과거와 현재


동문(낙풍루)의 여러 모습

부근에 주차장이 있어 대부분 관광객의 출입문 이기도 하다.
동문과 남문은 사진처럼 성문 바깥쪽 성문 정면으로 ㄷ자형 옹성(瓮城)이 성문을 에워 감싸고 있어 적군이 쉽게 성문에 접근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다.

맨위 성벽 사진을 자세히 보면 3개의 구멍이 균일하게 배치되어 있다. 이것을 여장 이라하고, 여장은 타구(朶口)로 나뉘어 있고 여장에는 총안(銃眼)=사구(射口)가 있고 이 총안 역시 근총(近銃)과 원총(遠銃)으로 나누어 있다. 3개의 구멍중 가운데 것이 근총이고 양쪽이 원총이다.  근총에서 성벽 바로  밑으로 활을 쏠 수 있고 원총은 멀리 활을 쏠 수 있는 구조이다.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아래사진은 성벽 안쪽이다.
바깥쪽 입구에 입장권 검표실이 볼쌍사납다. 달리 배치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성벽 위, 치성

이 성은 외탁(外托)과 내탁(內托)의 양면이 석축으로 쌓여 있는 협축(夾築) 구조이다.
외탁이란 성벽 바깥쪽, 내탁이란 성벽 안쪽을 말한다.

성곽을 따라가면凸 형의 성곽이 있는데 이는 치성(雉城)이라고 한다. (사진 좌측에 돌출한 성곽)
당초 6곳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4곳만 남아 있다. 이 치성은 초소(망루) 역할을 했던 곳으로 좌우로 침입하는 적의 동태를 살피기도 하고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축조되었다.


치성에서 바라 본 남문(쌍청루)


남문(쌍청루)
옹성, 여장, 타구, 총안을 좀더 자세히 볼 수 있다.


서문(낙추문)
바깥쪽에서 안쪽을 바라 본 모습


성 밖으로 나가는 물길


성벽에서 바라 본 민속마을
좌측이 성 안쪽 마을, 오른쪽이 성밖 마을


마을 이모저모
모두 실제로 주민이 거주하는 마을이다.


임경업 장군 선정(宣政)비각


옛날 장터

마을 아주머님들이 농산물을 판매하며, 식당, 주막, 찻집, 대장간 등이 옛날 모습으로 운영되고 있다.



낙안 객사(客舍)

낙안 읍성의 가장 중심부에 세워져 있어 읍성의 모습을 조망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1451년에 건립되어 1631년과 1857년 2차례의 중수가 이루어졌다.


동헌

이 건물은 조선왕조때 지방관청으로 감사, 병사, 수사, 수령등이 지방행정과 송사를 다루던 곳으로 동쪽은 수령이 서쪽방은 관리들이 사용하던 곳이다.옛 자리에 정면 5간, 측면 3간, 37.51평 팔작 지붕에 가운데 청 마루를 두고 뒤편에 적은 마루가 있다.


낙민루

조선 헌종때 군수 민중헌(閔重憲 1845∼1846)이 중건하였으며 (또는 조용현(趙溶鉉)이 중수하였다고 함) 남원의 광한루, 순천의 연자루와 더불어 호남의 명루로서 1924년 일부분을 수리를 하였다고 한다. 오랜 세월 낙안 군민과 함께 희로애락을 나눈 루각 이었으나 여순 병란 당시 좌익들에 의해 지서가 소실되어 낙민루 에서 임시 경찰 업무를 수행하던 중 6. 25가 나자 공산군들이 낙민루를 불태우고 말았다.


옥사

옛날 이 고을에서 죄를 지은 죄수들을 격리 수용하였던 감옥
죄짓고 살 일은 아니다.


전통가옥 체험장

옛날 농기구, 물레 등 가내수공업 기구, 살림살이 도구 등이 전시되어 있고
체험도 가능하다.


마을 구석구석

전통가옥이 잘 보존되어 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있다.
민박도 가능하다.

판소리, 전통도예 등을 관람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곳도 있다.
서당, 엿 만들기, 대장간, 연자방아, 물레방아 등
1박하며 옛전통과 문화를 체험하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다.

순천만의 갈대밭낙안읍성민속마을을 묶어 가족여행지로 추천할만 하다.

     

2010 남도여행을 마치며.....


이번 여정은 자신을 시험하고 변화를 찾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다.
2일째 부터 왼쪽 장딴지 근육통으로 시달려야 했지만 이 또한 나에게 소중한 경험이며 경고이다.
새출발을 위한 다짐도 했고, 우리 자연의 아름다움도 만끽했다.
푸근한 인정도 느꼈다.
아쉬움이 있다면 욕심이다.
이제, 4박 5일간의 남도여정을 마무리 한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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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소생각
(2010 남도여행 9)

내가 처음 쌍계사를 찾은 것은 1989년경으로 기억된다. 실로 긴 세월이다.

아내가 운전면허를 취득한 시기가 88년 인천에 근무할 때이고,  그후 한적한 곳에서 간혹 아내에게 운전을 해보도록 했는데 쌍계사 주차장에서 펑크낸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당시 쌍계사 앞은 상가도 별로 없었고 무척 한산했다.  텅빈 넓은 주차장에서 운전하다가 보도턱을 들이받아 차가 주저않고 말았다.

예비 타이어로 갈아끼우고 나오던 길 어디선가 펑크 때우고 차량점검을 받았지만 서울로 돌아와 타이어를 보니  편마모가 심한 것이 발견되어 정비소에서 확인하니 휠이 휘어 나타난 현상이었다.  새삼, 아내가 운전을 숙달하는데는 이외에도 남의 차 문짝 두번을 수리해 주어야 했던 기억이 난다.  비싼 댓가를 치렀다.


그러나 오늘 다시찾은 쌍계사의 과거기억은 희미하고 주변이 무척 변했고 절의 규모가 역사에 비해 그리 크지 않다는 점과  몇해 전 화재 소식을 접하고 안타까워 했는데 그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쌍계사에도 절 뒤로 2.5km 올라가면 불일암이 있어 들르고자 시도했으나 역시 다리 근육통으로 포기하고 쌍계사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특히 불일암 오르는 길목의 자연관찰을 돕기 위해 상세한 안내문을 절 입구에 마련하여 찾는 이에게 도움이 되도록 친절한 배려가 있음에도 관찰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과거에는 산사를 찾으면 주변을 산책하는 정도였으나 요즘은 건축물의 구석구석 살피는 재미에 또다른 맛을 느끼게 된다.

         


쌍계사 입구 하동茶문화센터와 벚꽃축제를 알리는 애드벌룬


절 입구 쌍계1교에서 꽃단장중인 엿장수와 절을 찾은 수녀님.
쌍계사에서 여럿 수녀님을 만났다. 단체로 관광 오신 것 같다.


절입구 계곡에 걸친 자그마한 사장교. 세월을 읽게 한다.
위에 허름하고 자그마한 건물에는 목욕탕이라 쓰여있다.
옛날 부락민들께서 계곡물을 이용해 공중목욕탕을 운영하였던가 보다.


매표소를 지나 설치된 사찰 안내도
불일암까지 이르는 2.5km 길목에 자연생태 관찰 포인트를 설명해 두었다.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사찰에서 입장료 받는 몫을 어느정도 한 것 같아 흐믓하다.


일주문 오르는 길목
도로변에는 초파일 준비로 연등을 내걸었다.


일주문 여러모습
일주문을 촬영하려 준비하는데
수녀님이 쑥스러운듯 얼른 모자를 쓰고 고개를 숙였다.
사진은 빛과 위치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엿보게 하는 재미가 있다.


일주문 지나 금강문 사이
고개를 돌려 작은 계곡주변에 담장과 대나무 숲이 운치있어 보인다.


사천왕문을 지나 석탑, 석등
역시 여러 각도에서 살펴 보았다.
석등 아래에는 득남득녀를 바라는 분의 간절함이 적힌 기와


사찰경내가 어디서 보아도 아름답다.


경내 설치한 연등모습을 다각도로 살펴 보았다.


고목나무 사이로 바라 본 사찰


청학루

이곳에서는 승려의 길에 들어선 분들이 수련하던 곳이라 한다.

당시 그분들은 어떠한 심정으로 고행의 길에 들어섰을까?
주변을 맴돌며 나의 나아갈 바를 생각한다.
이곳을 지나면서 불일암 오르는 산길이 시작된다.
작정하고 불일암으로 향했다.


높은 곳에서 바라 본 쌍계사

그러나 얼마 오르지 못하고 주저 앉았다.

발을 높이 쳐들 수가 없다.

걸터 앉아 쌍계사를 내려다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잠시 땀을 식힌 후 돌아 내려와
다시  사찰 경내 이곳저곳 살피며 쉬엄쉬엄 걸었다.


쌍계사 주변에는 대나무 숲이 발달했다.
산중의 사찰은 어느 절을 가던 우리고유의 건축물 양식과 잘 어울린다.

특히, 고목과 대나무 숲에 둘러쌓인 쌍계사는

그 역사만큼 그윽한 향기를 뿜어내는 것 같아서 좋다.

사찰을 둘러보는데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는다.

쌍계사를 떠나기전 유래는 살펴보고 가야겠다.

쌍계사의 유래

쌍계사(雙磎寺)는 신라 성덕왕 21년(722년) 대비(大悲), 삼법(三法) 두 화상께서 선종(禪宗)의 六祖이신 혜능스님의 정상을 모시고 귀국, "지리산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 : 눈쌓인 계곡 칡꽃이 피어있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호랑이의 인도로 이 곳을 찾아 절을 지은 것이 유래가 되었다.

그 뒤 문성왕 2년(840년) 중국에서 선종의 법맥을 이어 귀국하신 혜소 진감(眞鑑)선사께서 퇴락한 삼법스님의 절터에 옥천사(玉泉寺)라는 대가람을 중창하시어 선의 가르침과 범패(梵唄)를 널리 보급하시었으니 후에 나라에서 "쌍계사"라는 사명을 내렸다. 그간에 벽암, 백암, 법훈, 만허, 용담, 고산스님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동안 고색창연한 자태와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쌍계사는 국보 1점(진감국사 대공탑비-국보47호), 보물 3점(대웅전-보물 500호, 쌍계사 부도-보물 380호, 팔상전 영산회상도-보물 925호) 의 국가지정 문화재와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청학루, 마애불, 명부전, 나한전 등의 많은 문화유산, 칠불암, 국사암등의 암자가 있으며, 조계종 25개 본사중 제13교구 본사이기도 하다.


  하동 여정 후기 

화개장터에 이틀을 머무르며 식사를 한 "화개장터 정육, 식당" 이다.
먹는 것에 그다지 까다롭지 않은 나에게 친절함은 다시찾고 싶은 곳이다.

특히, 주인장이신 칠순의 경상도 할머님은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고 공기밥을 덥석 가져다 주신다.  일정을 하루 연장하며 여유시간에 구례방면을 돌아보고 싶어 자전거가 아쉽다고 하니 손주놈 통학용 자전거를 내주신다.

기아변속이 고장나긴 했지만 나그네에게 선듯 내주신다. 나름 유용하게 이용했다.
내가 정육점 식당에서 혼자 먹을 수 있는 것은 김치찌게, 된장찌게 뿐이다 보니 이틀 머무르며 같은 식사를 하는 것도 염려스러우신가 보다. 같은 밥만 먹을게 아니라 다른 식당에서 다른 메뉴를 먹으라고 권하시기도 한다.

이틀째 저녁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하고싶다고 하니 흔쾌히 손수 구워주신다.
보길도 여행중 삼겹살이 먹고싶어 식당을 찾았으나 3인분 이상이 아니면 안된다고 두 집에서 퇴짜맞은 생각이 난다.  혼자 여행다니다 보면 식사메뉴가 제한적이다.  인심 고약한 곳에서 혼자 식사하려면 취급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 빵과 우유로 끼니를 때운 경우도 있었다.

식당에는 할머님의 친구분이 홀에서 함께 일 하시는데 연세차이가 무척 나는 것 같다고 했다.
주인 할머님이 약간 약이 오르신듯 하다. 일부러 그래 보았다.

떠나던 날, 언제 다시 올거냐고, 아내와 함께 오라고 하신다. 기약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회가 있다면 내집같은 마음으로 다시찾고 싶은 곳이다.

부디, 두 분 할머님께서 깊은 우정 나누시며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빌어드린다.

이식당은 화개터미널 옆에 있다.
전화는 055-883-3918


아래 모텔은 섬진강과 남도대교가 바라 보이는 낮은 언덕에 위치한다.
화개장터에서 하동쪽으로 500M 정도 내려가야 하지만 깔끔하고 전망이 좋다
화개 도착하던 날, 배낭도 맡길겸 도착하여 바로 숙박장소로 정했다.


아래는 "화개장터" 식당 할머님이 추천하신 식당겸 모텔이다.
쌍계사에서 내려오는 계곡 옆이고 "벚꽃십리길" 초입이다.
역시 깔끔하고  특히, 옥상 조망이 좋다.


쌍계사에서 "벚꽃십리길"로 가던 길에 만난 도로공사 상인이다.
옛물건 박물관이다.
구경하는 재미 솔솔하다.
어린시절을 생각나게 한다.


계속 ......(여정 마지막, 순천 낙양읍성)

황소생각의 하늘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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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남도여행 8)

함께하기에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무리가 있다.
세상에는 홀로하기에 아름다운 것이 있고, 함께하기에 아름다운 것이 있다.
함께하기에 아름다운 것을 우리가 "군락(群落)"이라 이름지어 부르는 곳 들이다. 

벚꽃은 봄 소식을 전해주는 대표적인 꽃나무로서 우리나라 전역에서 쉽게 볼 수 있지만 "벚꽃놀이"라는 이름으로  무리지은 아름다움을 찾아 먼 길 마다않고 찾아 나선다.

구례 "산수유마을"을 찾는 것, 내장산 "단풍", 보성 "녹차밭"을 찾는 것도 "군락"의 아름다움 때문일게다.

화개의 "벚꽃십리길"을 포함하여 내가 찾았던 곳 들을 기억해 보면 "진해 군항제", 전남 보성 "대원사 길", 서울 여의도 "윤중로 길", 서울 남산 "산책로 길" 외에도 전국에 많이 산재해 있다.  옛날 어린시절에는 "창경궁 벚꽃놀이"가 유명했다.


이번 남도여행길에 들른 화개 "벚꽃십리길"은 여행일정을 연기하고 아침, 낮, 해질녘, 저녁 야경까지 지켜 보았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모습을 느끼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했다. 몸의 불편함도 지나칠 이유가 되지 못했다.  욕심 같아선 며칠 더 머무르며 바람결에 흩날리는 모습까지 지켜보고 싶었다.

자연의 "군락"뿐만 아니고 사람들이 모여사는 부락도 "군락"이라 한다.

사람들이 모여사는 부락에는 세상사는 인간의 아름다움이 있다.
이웃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아름다움 이다.
부족한 것을 서로 나누며 부조(扶助)"라는 이름으로 상부상조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움 이다.

"인간은 사회성" 동물이라 했다.

홀로 살아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인간군락을 이루며 상부상조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부락이 도시화하며 얻는 것이 있다면 상실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이웃과 경쟁 속에 내 몰리며 쏟아지는 정보 속에 인간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부디, 이웃의 존재가 소중함을 알며, 이웃과 함께하기에 "군락"을 이루고, 함께하기에 아름다움이 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실은 지난 주 토요일 친구 부친의 부고, 목요일 인천에서의 친구 49제, 어제 토요일, 경북 예천의 상가집에 다녀오며  차창 밖에 펼쳐지는 세상을 살펴보며 함께하는 세상을 생각했다.   


계곡에 홀로 고개내민 진달래도 아름답다.

험난한 절벽에 몸을 의지한 난초도 아름답다.
홀로 지새며 맑고 아름다운 향기를 남기고 가신 법정스님도 아름답다.

그러나 홀로하기 어려운 못난이들은 함께하는 아름다움을 지켰으면 좋겠다.

화개 "벚꽃십리길"을 정리하며 넋두리 부터 시작한다.

         



구례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하동에 접어들면
"당신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가고 있다"며  나그네를 반긴다.



화개장터 벚꽃축제를 알리는 아치



계곡 물살에 추위를 타는듯 아직 꽃을 피우지 못했다.



오전 "벚꽃십리길" 모습
도로도 아직 한산하고 벚꽃이 만개하지 않았다.



하동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녹차밭



동서로 흐르는 계곡 양지바른 곳으로 벚꽃들이 얼굴을 내밀고 꽃을 피운다.
계곡 곁에 봄의 화신 개나리와 함께 어울린다.



대나무 군락과도 잘 어울린다.
벚꽃은 무엇과도 어울리는 것 같다.



하동 "벚꽃십리길"에서 가장 으뜸이라 할 수 있는 구간이다.
도로 중앙이 양측으로 벌어지고 가운데로는 보행자 산책로를 조성해 놓았다.
때문에 벚꽃을 위아래에서 즐길 수 있다.
이곳에서 이리저리 오가며 흠뻑 취했다.



지나 온 쌍계사 방면을 돌아 보았다.
길따라 벚꽃이 숲을 이루고 있다.
이름하여 화개 "벚꽃십리길"이다.



고개를 살짝드니 벚꽃사이 지리산 자락엔 구름이 걸쳐 흐르고
맑은 하늘은 푸른색으로 채색되어 한폭의 그림같다.
누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을 수 있을까?
사진만의 매력이다.



길거리 사진사에게 부탁했다.
내 얼굴이 많이 탓다. 코끝은 유난히 붉다.
모자 쓰기를 싫어하는 내탓이렸다.



이리저리 오가며 요리저리 둘러보기에 여념없다.



달리는 차량도 벚꽃사이로 숨어든다.



벚꽃사이로 멀리 "남도대교"가 모습을 들어낸다.
왜면하면 아쉬워 하는 듯하여
모습을 담았다.

         


오늘 오전엔 먼저 쌍계사에 올랐다.

내려 오는 길에 "벚꽃십리길"을 들러 오후에는 순천 "낙양읍성"으로 건너가 여정을 마무리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벚꽃십리길"에서 만난 길거리 사진사 말에 의하면 야경도 무척 아름답다고 한다.  살펴보니 조명설비가 보인다.  망설이던 끝에 하루 연기하기로 작정했다.

오후 여유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며 늦은 점심을 먹던 차에  어제 저녁부터 식사하는 식당 할머님께서 손주 자전거를 내어 주셨다.  그 자전거를 이용하여 당초여정에서 포기했던 구례-하동구간 일부를 돌아보기로 했다. 
잘하면 구례 "운조루" 까지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로에 나서 폐달을 밟고 잠시후 문제가 발견되었다. 자전거의 기어가 변속되지 않는다. 저속기어로 고정되어 내 능력으로는 어쩔 수가 없어 그대로 갈 수 밖에 없다. 잠시후 또다른 문제는 대형 트레일러 차량이 뒤에서 울리는 고약한 경적 소리이다. 바로 내 뒤에서 울리는 것이 다소 고의적이며,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아무런 안전장구 없이 고장난 자전거로 좁은 19번 국도를 하이킹 하기에는 다소 무리인듯 싶다.


차량이 적은 건너편 861번 지방도로 건너 갈 수도 없는 구간이다. 계획을 수정하여 "운조루"는 포기하고 약 4km 정도구간을 쉬엄쉬엄 다녀오기로 했다. 



하동에서 고장난 자전거로 구례방면으로 길을 나섰다.
길가 곳곳, 벚꽃나무 사이로 매화가 고개 내민다.
특히, 홍매화는 하얀 벚꽃 사이에서 자태가 더욱 폼난다.



피아골 입구마을 노송사이에  홀로하는  벚꽃이 호소하듯 활짝 만개했다.
이곳에서 벚꽃은 객이다.



섬진강변 좌측 19번 국도와 우측 861번 지방도로의 벚꽃길



강변 어귀에 나란한 벚꽃나무
같은 벚꽃나무 이지만 수종이 다른 모양이다.
확연히 구별된다.
나는 이들을 "연인벚꽃"으로 칭하련다.



이름모를 빠알간 꽃이 숲사이에 숨어있다.
헤집고 들어가 반갑다고 인사 나누었다.



피아골에서 흘러오는 계곡물이 섬진강에 합류하는 지점이다.
도로에서 내려와 계곡물에 발을 담구었다.
여유를 즐겼다.



다시 화개로 돌아와 "벚꽃십리길" 야경을 준비하며 장터 주변을 둘러보던중 발견한 곳이다.
개나리와 벚꽃이 만개하여 사이좋게 나란히 하고 있다.

         

오후 늦은시간 다시 "벚꽃십리길"로 접어들었다.

조명이 켜지기 전 오후 6시가 다소 지날무렵 이다.
벚꽃이 오전가 다르게 많이 피었다.



벚꽃에 흥분한 나들이객의 사진사가 되어주며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예쁜 어린이에게는 간식으로 준비한 초커렛도 나눠주며
"김치"를 연발했다.

         

다시만난 길거리 오후 7시, 드디어 조명이 밝혀졌다.

화개의 식당들이 묻닫는 9시까지는  돌아가는 시간, 식사시간(반주포함)
감안하여 약 30~40분 이다. 
그 시간을 최대한 즐겨야 한다.사진사와 가벼운 인사도 나누었다.



벚꽃이 가장 아름다울 때를 말 하라고 하면
나는 단연코 바람결에 꽃잎이 흩날릴 때라 말하고 싶다.

토요일 하동에 올 때만 해도 꽃봉우리가 터지지 않았다.

그날 부터 만개한 오늘까지 지켜보며 꽃잎이 흩날리는 모습까지 지켜보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가야 하는 아쉬움을 간직한채 식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지금쯤, 벚꽃이 흩날리겠지.......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사실은 소+맥) 마시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오늘도 어김없이 "남도대교"는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계속....(다시찾은 쌍계사)

황소생각의 하늘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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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 화개장터 3.1운동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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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소생각
(2010 남도여행 7)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무대 평사리는 하동과 화개장터 50리 길의 중간지점에 위치한다.  섬진강가에 조성된 "평사리 공원"에서 약 2km 정도 들어가 있다. 다리 통증 때문에 높이 올라가야 하는 코스는 모두 포기했으나 이곳 평사리의 "토지" 무대중 "최참판댁"과 드라마 촬영장소였던 부락은  둘러보기로 했다. 그외 "조씨고택"과 "취간림"도 포기했다.

아래 지도를 보면 "최참판댁"이 화개장터에 가까운 곳으로 표시되었으나 사실은 섬진강대교와 화개장터 거의 중간지점이다.


이와 같은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무대 안내판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하동 관광안내 지도

"토지"는 5부 21권으로 구성되었다.
소설을 읽지 못했고 드라마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박경리 선생의 "토지"가 우리나라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작품임은 익히 잘 알고 있던 터에 이곳을 지나칠 수 없다. 섬진강길 줄기따라 펼쳐진 여행지를 살펴보면 구례방면은 "운조루"를 뺄 수 없으나  예상치 못한 왼쪽다리 근육통으로 구례에서 화개장터 구간 40 여리는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광양방면 861번 지방도로의 섬진대교 인근에 "매화마을" 있으나 섬진강 줄기 건너편이라 모두 답사하기는 역부족 이다.  다만 "운조루"에 대한 아쉬움이 있어서 찾아 보았다.


"운조루"의 일부 모습

운조루는 호남의 대표적인 명가 가운데 하나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살림집이다. 운조루의 입향조(入鄕祖)는 조선중기에 무과에 급제한 대구출신의 류이주(柳爾  )라는 사람이다. 경상도에서 삼수 부사를 지낸 후 이곳이 풍수적으로 길지라고 믿고 들어온 곳이기 때문에 조선 후기 터잡기 양식을 파악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운조루는 유이주가 말년을 보내기 위해 지은 집으로 그가 이곳에 들어오게 된 풍수적인 이유는 강 건너 오봉산이 아름답고, 산들이 다섯 가지 모양을 모두 갖추어, 물이 풍부하고, 풍토가 후덕하고, 대기가 사람이 거처하기에 좋다는 다섯 가지였다.

운조루는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위치해 있다. 이 곳 토지면(土旨面)은 과거에 토지(吐指)라고 하여 금가락지를 토했다는 곳이다. 풍수에서 말하는 금가락지가 땅에 떨어진 곳, 즉 금환낙지(金環落地)의 형국이다. 금가락지는 여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정표로서 성행위를 하거나 출산할 때만 빼는 것이었다. 따라서 가락지를 빼내어 땅에 놓는다는 것은 생산을 의미하는데, 이 땅이 풍요와 부귀영화가 샘물처럼 메마르지 않는 명당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운조루가 위치한 오미리는 금환낙지라는 형국과 함께 금거북이 진흙에 묻혀 있는 형국(금구몰니:金龜沒泥形)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금구몰니란 말은 금거북이가 진흙 속에 있다는 말인데, 입향조인 유이주가 돌밭을 일궈 집을 지으면서 거북처럼 생긴 돌이 나와서 금구몰니라는 명당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집은 조선시대 양반가의 대표적인 구조이며 집터는 一자형 하인들의 방(행랑채)과 T자형 사랑채, ㄷ자형의 안채가 있고 대문 안의 행랑채가 서로 연이어져 있고, 안채의 뒷면에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구조양식은 기둥과 기둥 위에 건너 얹어 그 위에 서까래를 놓는 나무인 '도리'와 그 도리를 받치고 있는 모진 나무인 '장어'로만 된 구조(민도리집)로서, 지붕은 사랑채, 안채가 연이어져 있으나 팔각지붕으로 되었다.


"평사리 공원"에 위치한 "섬진강 탄곡" 비

섬진강 이름의 전설

고려말, 왜구들이 섬진강 나루터에 침입해 오자 두꺼비 수십만 마리가 몰려와 울부짖어 왜구들이 그 소리에 놀라 도망을 가게 되었다. 그후에 또 왜구들이 쳐들어 왔을 때는, 우리 병사들이 꼼짝없이 붙들리게 되는 처지가 되었는데 두꺼비 떼가 강물 위로 다리를 놓아 우리병사들을 건네주고, 뒤따라 온 왜구들은 두꺼비들이 그대로 강물 속으로 들어가 버려 모두 빠져 죽게 하였다.  이때부터 "두꺼비 섬(蟾)"자와 "나루 진(津)"자를 써서 "섬진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섬진강변 "평사리 공원"의 여러 모습


평사리 들녘, 멀리 19번 국도 벚꽃길


평사리 "동정호"


평사리 "평사드레 문화교류 센터"

평사리 공원에서 나와 삼거리에서 "최참판 댁"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이곳은 숙박도 가능하다. 그리고 "토지" 무대를 자전거로 돌아 볼 수 있도록 대여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무척 반가웠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는 대여를 하지 않는다. 안전문제로 보험가입을 협의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타결을 보지못해 자전거등 모든 준비를 하고서도 대여를 못하고 있다. 조만간 타결되어 자전거를 이용할 수 있다면 나 같은 여행객에게 무척 반가울 것 같다.


"최참판 댁" 입구에 "박경리 토지 문학비"

박경리 선생은
1926년 경남 통영에서 출생하여 1946년 진주여고를 졸업했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단편 『계산』 등이 『현대문학』에 실리면서 등단했다. 이후 1959년 『표류도』, 1962년 『김약국의 딸들』, 1964년『파시』, 『시장과 전장』 등의 장편을 발표했다. 『토지』는 1969년부터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하여 1972년 9월까지 1부를 집필했다. 『토지』 2부는 같은 해 10월부터 1975년 10월까지 『문학사상』에 3부는 1978년부터 『주부생활』에 4부는 1983년부터 『정경문화』와 『월간경향』에 각각 연재했다.

마지막 5부는 1992년부터 <문화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1994년 8월 15일 마침내 대하소설 『토지』의 전작이 완결되었다. 25년에 걸쳐 원고지 4만 장 분량으로 탈고된 것이다. 한말로부터 식민지 시대를 꿰뚫으며 민족사의 변천을 그리고 있는 대하소설 『토지』는 탈고 전에 이미 한국문학의 걸작으로 자리잡았고 박경리는 한국문학사에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거봉으로 우뚝 섰다.

서점에 확인해 보니 모두 21권으로 모두 읽어보려면 별도의 계획이 필요할 것 같다. 다음 기회로 미루고 줄거리를 찾아 보았으나 워낙 장편이라 짧은 줄거리로 소개하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찾지 못하고 출판사에서 소개하는 내용은 이러하다.

"경남 하동의 평사리를 무대로 하여 5대째 대지주로 군림하고 있는 최참판댁과 그 소작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박경리 대하역사 장편소설. 1860년대부터 시작된 동학운동, 개항과 일본의 세력강화, 갑오개혁 등이 『토지』 전체의 구체적인 전사(前史)가 된다. 동학 장군 김개주와 윤씨 부인에 얽힌 비밀이 차차 풀려나가고, 신분문제와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혀 귀녀와 평산 등이 최치수를 살해하는데... "


"최참판 댁"에 오르는 길목

둘러보는대 약 2시간이 소요되었다.
"토지문학관" 등을 제외하고도 말이다.


기념품점의 지붕을 멋지게 꾸며 놓았다.
푸른 하늘과 흐르는 구름과도 무척 어울린다.


길목에 위치한 우물


손님을 기다리는 우마차

매표소를 지나면 차량통행이 제한된다.
노인을 위해 전동차량이 눈에 뜨인다. 그리고 우마차도 보인다. 매우 한가롭고 멀리 평사리 들판이 내려다 보인다. 그 뒤로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 줄기

평사리 "최참판댁"과 조선후기 서민의 주거환경 모습

지리산 거대한 능선이 남으로 가지를 친 남부능선의 대미에 해당되는 성제봉 아래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진다. 미점리 아미산 아래에서 동정호까지의 넓은 들판, 만석지기 부자를 서넛은 낼만한 악양 '무딤이들'이 그것이다.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토지」의 무대로 유명한 악양 평사리는 섬진강이 주는 혜택을 한 몸에 받은 땅이다. 평사리가 위치한 지명인 악양은 중국의 악양과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중국에 있는 지명을 따와서 평사리 강변 모래밭을 금당이라 하고 모래밭 안에 있는 호수를 "동정호"라 했다.

악양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 중에 소상팔경이 있으며, 평사리들에 위치한 동정호와 악양의 소상팔경은 이곳 사람들의 자랑거리로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가득 담긴 풍경을 자아낸다. 또한 형제봉 중턱 300m에 위치한 사적 제151호 "고소성"은 신라시대 축성한 것으로 섬진강과 동정호를 발아래 두고 천년의 발자취를 말해준다.

동학혁명에서 근대사까지 우리 한민족의 대서사시인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인 이곳 평사리에 소설속의 최참판댁이 한옥 14동으로 구현되었으며, 조선후기 우리민족의 생활모습을 재현해 놓은 토지세트장이 잘 조성되어 있고 인근의 평사리 문학관도 좋은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 매년 가을이면 전국문인들의 문학축제인 토지문학제가 이곳에서 개최되어 문학마을로서 자리매김 될 것 같다.


"최참판 댁" 주변 마을

드라마 촬영목적으로 지어져 지금은 수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토지 문학관" 입구의 대나무 숲


"최참판댁" 누각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간식도 먹으며 디카의 메모리 확보를 위해 노트북으로 옮겨 두었다.
햇볕은 매우 따사로우나 봄바람이 무척 선선하다. 촉촉이 젖은 옷사이로 부는 바람이 싸늘함 마저 느끼게 한다.
멀리 내려다 보이는 평사리 들녘과 섬진강 줄기를 바라보며 나도 최참판이 되어 보았다.


최참판댁 구석구석을 살폈다.
옛 정취도 느꼈다.


"최참판댁"을 2시간여 둘러보고 나오는 길목, 갈대숲

"평사드레 문화교류 센터"앞에서 국밥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도로를 벗어나 하천 뚝방 위의 갈대숲을 헤치며 19번 국도로 나아갔다. 시간을 보니 오후 1시가 되었다. "최참판 댁" 뒤로는 "고소산성"이 있다. 섬진강을 조망하기에 무척 적절한 곳이고 그리 높지 않으나 다리 근육통으로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포기해야만 했다.


고소산성

고소성의 유래

이 성은 지리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의 중복 3백m의 형제봉 고지에 위치하고 있다. 동북은 준령을 등지고 서남으로는 섬진강과 동정호를 발밑에 둔 천연의 요충으로 남해에서 호남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목을 쥐고 있는 형세에 놓여 있다. 성은 이와 같은 지리를 이용하여 산복의 능선에 축성한 석성이다. 성벽은 둘레 약 8백m, 높이 3.5~4.5m이고 그 단면이 사다리형(저면 폭 6m, 상면 폭2m)인데 가공한 장방형 석재를 써서 견고하게 쌓고 남북에 두 개의 성문을 설치하였다.

계속...(화개 벚꽃십리길)
황소생각의 하늘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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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소생각
(2010 남도여행 6)

앞서 언급했듯이 어제 늦은 오후, 버스편으로 하동에 도착하고 부터 다리의 근육통이 더욱 심해 걷기가 부자연스럽다. 휴대폰 충전이 필요해 편의점에 충전을 의뢰하며  배낭도 부탁했다. 배낭의 무게마저 벅차다. 그리고 자전거 점포를 찾았다. 도보여행을 포기하고 자전거를 빌려 볼 요량 이었다.

읍내에서 두 군데 찾았으나 모두 대여가 불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없고 섬진강변 도로 폭이 좁아 위험하여 대여를 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일단 병원부터 찾았으나 토요일 오후라 모두 문을 닫았다.

고민끝에 승용차 렌탈을 하려고 하동시내 렌트 회사에 문의하니 주말이라 모두 나갔다는 설명이다. 다시 구례쪽 렌트회사에 확인하니 그쪽 사정도 마찬가지 이다. 심지어 순천쪽도 마찬가지 이다. 승용차 렌트는 포기해야 했다.

일단 숙소를 정하고 쉬며 생각하기로 했다.

마침 숙소의 나이드신 아주머님께서 안티프라민 맛사지를 권유하신다. 약국에서 구입하여 바로 맛사지를 하고 PC방을 찾아 공사모 카페등을 점검하며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7시, 아침식사를 위해 식당을 찾았다. 그때까지 결심을 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도보냐, 거점별 버스 이동이냐......


김밥나라 식당은 먼저 소개하고 가야겠다.
이때까지 망설이던 나에게 결심을 하게 하였고 매우 친절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아침으로 우동과 김밥 한 줄을 주문하고 홀로 일하는 중년 아주머님께 나의 여행 계획을 대략 말씀드리니 하동에서 화개장터 가는 길목에 특별히 볼만한 곳은 없으나 "하동 송림"은 꼭 들른 후 버스편으로 화개장터로 갈 것을 권유하신다. 송림까지 걸어서 10분이면 충분하지만  다리가 불편하니 자신의 승용차로 대려다 주시겠다고 하신다. 그때까지 나 혼자 식사중 이었다.


그러나 식사를 마칠무렵 여러분의 손님과 김밥 주문이 들어오니 홀로 일하는 식당에서 잠시도 시간을 비울 수 없는 처지가 되었으나 오히려 미안해 하시며 길안내를 자세히 일러주신다.  (이 식당은 하동터미널에서 하동농협 중간지점에 위치한다.)



철길 건널목

섬진철교 방향이다.

오랜만에 보는 시골 철길주변이라 사진에 담았다.


하동초등학교 100주년 기념광장

2007년에 개교 100주년이 된 유서깊은 초등학교이다.

학교는 담장이 없으며, 시민공원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어있다.
운동장에서 아침운동 하는 분 들을 볼 수 있다.

다시 "하동송림"으로 가는 길

운동복 차림의 노신사가 아침인사를 건낸다.
어디서 온 여행객이냐, 행선지가 어디냐  물으시며
사진작가협회 하동지부 부회장이라며 자신을 소개한 후
"하동송림"과 간단한 하동소개를 말씀해 주셨다.

따뜻함에 감사드린다.



섬진강 하구 "하동송림" 앞 백사장에서 바라 본 섬진강 철교



섬진강 하구 "하동송림" 앞 백사장에서 바라 본 "섬진대교"

좌측이 전남 광양, 백사장 쪽이 경남 하동이다.


하동송림

조선 영조 21년(1745) 하동도호부사 전천상이 섬진강변의 바람과 모래를 막아 백성을 잘 살게 하기 위해 광평리 일원에 심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1935년 섬진교를 준공하고 홍수방지를 위한 제방공사를 하면서 송림의 일부가 훼손되어 지금은 7,881평에 620여주의 노송과 300여주의 작은 소나무가 전국 제1의 인공 숲을 이루고 있다. 맑고 푸른 섬진강이 감돌아 흐르고 백사장과 어울려 빼어난 풍광은 가히 백사청송(白沙靑松)이라 할 만하다.


전체 송림을 1/2로 나누어 3년 단위의 안식년을 취해 노송을 보호하고 있다.

송림 속에 자리잡은 하상정(河上亭)은 주변 경치와 어우러져 운치를 더해준다.
시인이라면 절로 시상이 떠오를 것만 같은 빼어난 송림이다.


하상정(河上亭)과 송림


송림에서 하늘을 우러러...



"섬진대교"에서 내려 본 섬진강

강 중앙에서는 어부가 그물을 드리운다.

조용한 일요일 아침의 고요함이 흐른다.


"섬진대교"에서 바라 본 상류 방향

우측 벚꽃길이 화개장터 올라가는 19번 국도

오늘은 어제보다 다리가 다소 풀려 "하동송림"과 "섬진대교" 주변을 둘러 본 후 도보를 택했다.
그러나 대교옆 높지않은 공원에는 오르지 않기로 했다.
올라가 내려보면 시야가 트여 멀리 볼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가급적 조심하기로 했다.


19번 국도의 시작점

어제와 달리 오늘 벚꽃이 많이 피었다.

어제 버스편으로 섬진강길 따라 하동에 오면서 본 벚꽃과 다르게 많이 피었다.
하루밤새 변화다.


섬진강변 옛길
악양면 들어가는 삼거리 강변이다.


강변으로 내려와 본 하류방향

유유히 흐르는 강가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노자도덕경에서 물에 대해서 자주 언급했다.

제8장에서 최고의 선은 물이라 했다.(上善若水)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서로 다투는 법이 없다고 했다.
뭇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을 지향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물은 도에 가장 가깝다고 했다.
그러나 인간은 높은 곳을 지향하며 모든 악의 근원이 되고 있음을 경고했다.


강변의 갈대밭

곳곳에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고, 그 곁에는 갈대밭을 이루고 있다.
또다른 생명체의 보금자리 이다.


물가에 가까이 다가서 나의 방문을 기념하며 발자욱을 남겼다.


이곳은 "평사리 공원" 이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되었던 평사리에 인접한 강가에 조성된 공원이다.
억양면 평사리로 들어서면 TV드라먀 "토지"의 촬영장과 "최참판 댁"이 보존되어 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그곳은 "섬진강 물길 따라 50리, 화개장터 까지"에 이어 "섬진강 물길 따라 50리, 토지의 고향 평사리"라는 제목으로 이어서 포스팅 하여야겠다.



평사리를 돌아 나와 다시 화개장터 방향 도로변 벚꽃길을 걷는다.

강변에는 대나무 숲이 군락을 이루고 그 위로 벚꽂이 축복하고 있다.


강변에 드리워져 화사하게 핀 벚꽃



잠시 고개를 들어 벚꽃사이로 하늘을 올려다 본다.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구름 처럼 섬진강 따라 길을 걸으면서.....


다시 바라 본 상류 방향

스케치 하고 픈 그림이다.
강변을 걸으며 자주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화개장터 가는 도로가 시간이 흐를수록 정체된다.


오후에 들어서 부터 화개장터 방향의 차량이 정체를 이룬다.

내가 걷는 속도보다 느리다.
차에서 내려와 걷는 사람도 눈에 띄기 시작한다.
차에서 내려 운전을 교대하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다.

버스가 지나칠 때는 70%정도가 차량소리 보다 큰 울림이 들린다.

뽕짝이다. 이동식 디스코 텍 이다.
나는 강가쪽으로 걸어가기 때문에 화개장터에서 내려오는 차량을 마주보며 걷는다.
간혹 뒤에서 쿵쿵 울림이 들리면 그건 반드시 관광버스 이다.
엔진 소리는 그 이후에 들린다.

잠시 옛 생각을 해 보았다.


내가 인천에 약1년반 살던 때 이야기 이다.

그때가 88올림픽을 전후한 시기이고
큰 아들이 연안초등학교 입학후 서울로 돌아 왔으니까...
정확히 88년도 이맘때 인것이 확실하다..

토요일 오후 인천을 출발, 무박2일 벚꽃축제를 다녀오는 관광버스에

가족과 함께 들뜬 마음으로 몸을 실었다.
관광회사에서 모집하여 가는 행사였다.

버스가 인천을 벗어나 수원에서 추가로 관광객을 태우고

안내양이 진해 벚꽃축제 여정을 안내방송 한 후 분위기를 띄우기 시작한다.
승객들은 술잔이 오고 간다.

고속도로에 진입할 무렵 서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뽕짝이 시작되고 자리에서 일어나 좁은 통로에서 흔들기 시작한다.
광란의 디스코......

안내양의 신호에 따라 신속한 행동으로 잠시 조용해지기도 한다.

매우 훈련이 잘된 민방위 훈련보다 낫다.
밤이 깊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아이들은 굉음에 괴로워한다.

끌어않고 귀를 막아주며 주변을 살펴보니 일부 승객도 마찬가지 괴로운 표정이다.

나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이고 아이들은 버스에서 내리면 안되냐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만류하는 이 없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자정무렵,

이제는 흔들만치 흔들었으니 그들도 한숨자고 내일 벚꽃구경 해야할 터이니
점잖게  부탁해 보았다.

이제 주무시고 내일을 맞이하자고...

안내양은 모른척하고....
어느 취한,  연세 지긋한 분이
내게 고함을 지른다.
버스에서 내리라고....

그리고 요란한 뽕짝에 더욱 흔들어 댄다.

아이들을 달래며 체념하고 만다.
      .
      .
      .
      .
새벽녘,
경남 창영 부곡온천에 버스가 도착될 때까지 계속된다.

아침식사와 온천욕을 할 시간이 주어졌다.

밤새 괴로운 시간을 보낸 우리가족은
식사후 주변을 돌아보며 심호흡 한다.
그리고 기분전환 했다.

버스가 다시 출발하여 진해군항제 현장으로 다가간다.

해사 정문을 통과하며 우리는 벚꽃에 흠뻑취해 있을 때
광란의 밤을 보낸 그분들은 모두 주무시고 있다.

다시 버스가 진해시내를 벗어나...

어느 식당에 들어서며 안내양이 점심식사 안내방송을 하자
모두 눈을뜨고 일어나 점심식사를 한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광란은 다시 시작된다.
광란의 디스코 2부가 이어진다.
수원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된다.

무박2일의 첫번째 진해벚꽃 축제 여행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그당시 포니2 중고차를 가지고 있었으나 장거리 짧은 일정이라

관광회사 모집에 참여했던 것인데...

그이후 우리가족은 관광회사 모집여행은 일체 참여하지 않는다.

벚꽃과 곁을 스치는 무수히 많은 관광버스(쿵쿵거리며)를 보니 문득 기억이 난다.
너무 생생하게 떠 오른다.

아름다운 추억?



섬진강변에도 작물재배가 가능한 땅은 이렇게 "녹차" 재배를 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왠만한 경사 일지라도 야산에 녹차밭이 있다.
도로변에 찻집이 많이 보인다.


만발한 벚꽃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시 다리의 근육통이 시작된다.

강변 소나무 밑에 쉴만한 곳이 있어 안티프라민 마사지를 한 후 드러누웠다.

하늘을 올려보며 소나무와 대화한다.

너는 어째서 소나무냐?
나는 누구인가?


도로에서 벗어나 뚝방길로 걸었다.

강 건너 산자락에 흰부분들은 매화밭이다.

섬진강 하류쪽으로는 매화공원도 조성되어 있으나 모두 돌아 볼 수 없어 이번 여정에서는 제외 하였다. 
산 아래 희미한 부분이 861번 지방도로 이다. 그쪽은 차량통행이 다소 한산하다.


화개장터 방향 차량행렬

개나리가 뚝으로 들어선 지친 나그네를 위하여 화사하게 웃으며 반겨준다.


화개장터에 거의 다다른 것 같다.

뚝방끝을 지나 다시 도로에 접어들며 코너를 돌자 멀리 "남도대교"가 보이기 시작한다.
벚꽃 중앙으로 위치하여 찰칵!
다소 힘이 솟는다. 힘내자! 다왔다.


화개장터에서 내려오는 하이킹 행렬

버스기사 속좀 타겠다.

평소 같으면 중앙선 넘어 추월하면 되겠지만 오늘은 불가능하다.
난간에 몸을 기대어 자전거 일행이 진행하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걸음을 멈추었다.


아침 출발할 때와 또 다른 것 같다.

아침나절 보다 벚꽃이 더욱 활짝 피었다. 시시각각 다른 것 같다.
오늘이 "화개장터  벚꽃축제" 마지막 날이기도 하다.


"남도대교"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다.

몸은 고달프지만 생기가 돌았다.
아름다움을 기록에 남겨두기 위하여 위치를 잡아 다시 찰칵!
이때 시간 오후 3시 8분,   하동 숙소출발 오전 7시....


"남도대교" 앞 삼거리

경찰, 모범택시 기사 모두 동원된듯 하다.

화개장터 밖 도로변까지 임시 장터가 차지했다.


"남도대교" 위에서

다리를 건너면 전남 구례이고 계곡 옆의 산 능선을 경계로 전남 광양이다.

남도대교를 중심으로 2개 도, 3개군의 경계지점이다.

다리를 건너자 그곳에도 포장마차가 즐비하다.

미꾸라지 튀김 2마리 천원. 막걸리 한사발 천원.
시원한 막걸리 두 잔으로 목을 축이고 길가에 주저 앉아 땀을 훔쳤다.

땀이 눈으로 흘러들때면 매우 쓰리다.



남도대교에서 바라 본 상류

유유히 흐른다.


우리들 어머님의 강한 생명력

벚꽃관광  일행 일텐데, 주차장옆에서도 봄나물 채취에 여념이 없다. 항상 가족의 먹거리를 위한 아름다운 모습니다.
이번 여행중 질퍽한 삶을 살아가는 많은 어머님의 모습도 보았다.

잠시 "어머님"을 화두로 생각하다보니 도덕경중 生之畜之 외에 그 다음 문장 생각이 막힌다.

집에 돌아와 도덕경을 다시 펼쳤다.

도덕경에서 도道)는 만물의 "어머니"라 했다.

또, 낳고 키우되(生之畜之), 가지려 하지 않고(生而不有), 이루나 기대려 하지 않고(爲而不恃), 기르나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한다(長而不宰).  이를 이름하여 그윽한 (德)이라 했다.
"어머니"에 대해서 이 외에도 여러 장에서 언급하고 있다.

위 본문은 현대의 부모님들도 깊이 새겨야 할 내용이다. 한 문장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위대한 지침이다. 
그러나 요즘 젊은세대 어머님의 상을 보면 매우 실망스럽다.

자식을 식물인간으로 키우려 든다.

마네킹으로 키우려 든다.
앞서 "120% 마마보이 누구의 책임인가?"라는 제목으로 포스팅 한 바 있다.
그때도 무척 분개했을 때이다.

요즘 일반대학의 교수들에게 학점, 학사관리 까지 시비하는 부모님들이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질색한 바 있다.

심지어 사관학교 생도의 문제까지 사관학교 관계자에게 시비하는 부모도 있다고 들었다.
요즘 신세대 부모님들의 치맛바람이 대학캠퍼스 가지 파고 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는 스스로 성장하는 기회를 줘라.

품에서 때어내라.
책임있는 사회인으로 성장하도록 지켜보자.

사랑이란 위장으로

마네킹으로 만들지 마라.
식물인간으로 만들지 마라.
마마보이로 만들지 마라.

할 말이 많다.

이쯤 접어두고 아래 "학도의용군"을 생각하자.


학도의용군 충혼탑, 의용군 전적비 오르는 길

6.25전쟁 당시 10대의 나이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친 학도병 40여명중 26인의 영령을 모신 곳이다. 
이곳에 참전한 학도병은 여수, 순천, 광양 지역에서 혈서를 쓰고 지원한 중학교 학생들로서 육군 5사단 15연대 1대대 (부대장 조남철 소령, 중대장 정태경 중위)에 배치되어 1950년 7월 25일 이곳 화개지역 방어전투에서 4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흩어져 있던 시신 26위를 지역주민들이 수습하여 집단 매장한 장소이며 당시 생존자와 지역주민들이  매년 7월 25일 추모를 하고있다.


학도의용군 충혼탑
영령들께 묵념한다.


학도의용군 전적비

섬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세워 두었다.

그분들의 희생으로 지킨 조국의 번영을 굽어 살필 수 있도록...
영령들께서 북적거리는 봄날의 화개장터를 내려보시며
보람을 찾을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가자.

그분들의 숭고한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기억하자.



전적비에서 내려 본 "남도대교"


전적비에서 내려 본 섬진강 줄기

강 건너편은 전남 광양이다.


시골장터의 놀이패

지나가던 분들도 뛰어들어 함께 춤춘다.

각시의 입담이 구수하다. 
"분명, 아짐씬데 우째 남정네 거시기 보다 쎄다냐~~~" 
"내가 못해 보것네~~~~"
"신랑 잡아 먹것네~~~~"


빈자리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화개장터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따라
화개장터엔
아랫말 하동사람
윗말 구례사람
닷새마다 어우러져
장을 펼치네
구경한번 와보세요
보기엔 그냥 시골
장터지만
있어야 할건 다있구요
없을건 없답니다
화개장터
광양에선 삐걱 삐걱 나룻배타고
산청에선 부릉부릉 버스를 타고
사투리 잡담......    

화개장터의 유래

화개장터는 화개면 탑리에 있으며 5일장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곳이다. 지리산 맑은 물이 흘러 내려와서 섬진강과 만나는 곳에 자리한 화개, 경상남도와 전라남도를 이어주는 화개장터는 해방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5대 시장중 하나로 전국의 어느 시장보다 많은 사람이 붐볐던 곳이다.

이곳엔 5일장이 섰으며, 지리산 화전민들은 고사리, 더덕, 감자 등을 가지고 와서 팔고, 전라도 구례, 경남 함양 등 내륙지방 사람들은 쌀보리를 가져와 팔았다. 그리고 전국을 떠돌던 보부상들도 이 장을 놓칠세라 생활용품을 가지고 왔으며, 또한 여수, 광양, 남해, 삼천포, 충무, 거제 등지의 사람들은 뱃길을 이용하여 미역, 청각, 고등어 등 수산물을 가득 싣고 와 이 화개장터에서 팔았다.



"화개장터"의 여러 모습들....

이제 외국인도 장터에서 낯설지 않다.

엿장수도 옛모습이다.
화개장터가 "벚꽃축제"와 때를 같이하여 정말 "왁자지껄 장날"이다.


"남도대교 야경"

이제 해는 저물며 3일째 여정을 마무리 할 시간이 되었다.

무대를 대신하여 남도대교 조명이 흐르는 물처럼 다양한 색상으로 시선을 끈다.
2개 도와, 3개군에 걸쳐 화해의 상징처럼....

계속....(섬진강 물길따라 50리길, 토지의 고향 평사리)

황소생각의 하늘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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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소생각
(2010 남도여행 포스트 5)

"위아래 찬찬이 보세요. 위에는 점차 색이 흐려지고 아래는 점차 선명해 지거든요."   산수유 마을 입구에서 만난 소년의 말이다.  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이어서
"산수유 축제 때가 꽃색깔이 가장 예뻐요. 이제 축제기간이 지났고 색이 점차 옅어져요. 그러나 개나리가 예쁘게 피고 있어요.
아하!, 소년은 마을 입구 오르막 길가 산수유 아래 노랗게 핀 개나리 꽃과 산수유의 어우러짐을 함께 느끼라는 이야기 이다.

자연과 함께 살아 온 시골 소년의 맑고 고운 마음이다.  자연을 읽을 줄 안다.  도시 소년들에게서 읽을 수 없는 마음이다.  아니, 도시인에게서 느낄 수 없는 향기이다. 

내가 여행하며 현지인과 자주 대화를 하려는 이유가 도시인에게서 느낄 수 없는 정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 대화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소년이 말한 산수유가 꽃몽우리를 터트릴 때의 모습


가을에 무르익은 산수유

동토, 칼바람을 이겨내고 핀 산수유는

봄날에는 생동감, 신선한 아름다움을 선물한다.
여름날에는 선선한 그늘을 선물하고
가을에는 무르익어 또다른 아름다움과
인간에게 유용한 약재가 되어주며 한 해를 마감한다.
인간에게 수많은 메세지를 던져준다.
그러나..... 

어제 남도여행 1일차로 승주의 조계산 자락 송광사와 선암사를 거쳐 저녁에 구례읍에 도착하니 아무래도 왼쪽 무릎아래 느낌이 심상치 않다.  약국을 찾으니 이미 문을 닫았다.  아침에 파스를 붙이고 산수유 마을로 알려진 구례군 산동면 온천장에 도착했다. 

산수유 마을이라 하면 산동면 상위리와 하위리 마을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버스를 타고 오다보니 산동면 전체가 산수유로 뒤덥혔다. 참고로 구례에서 산수유 마을 상위리까지는 하루 4차례 버스가 운행된다.  온천장까지는 수시로 버스가 있으나 온천장에서 상위리까지 거리가 직선으로 약 3km에 이른다.



산동면 산수유 마을 일대

시골길을 여행하다 보면 길을 물어야 할 때가 있다.

보통 "저리 돌아가면 된다" 또는 "저기요" 식이다.
여기서 저기란 km 개념이다. 십수분 거리이다.
도시인의 몇백m 개념이 아니다. 몇분 개념이 아니다.

오늘도 예외가 아니다.

대형 주자장에는 노점상하는 아주머님을 여럿 만날 수 있다.
산수유 마을을 물으니 저리 돌아가면 된다는 예외없는 시골식 답변이다.
그러나 나는 여유를 가지고 산동면 일대를 모두 돌아보기로 작정한 만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방향만 정확하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온천단지 중동초등학교를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교량 부근에서 마주치는 정경이다.
둘러보며 셔터 누르기에 여념없다.
홀로 서있는 벚꽃나무가 애처롭다.


길을 걸으며 연신 셔터를 누른다.
배낭의 무개도 느끼지 못한다.
무릎아래 근육통도 잊었다.


산수유 사이로 밭이 보인다.
밭돼기는 얼마되지 않는다.
하기사 이곳은 산수유 재배가 주업인 것을 잊었다. 


산수유 사이 간간이 보이는 매화와
마른색의 무엇이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싱겁지 않게 해준다.


보기드문 보리밭 뒤로 산수유 속에 마을이 한가롭다.
푸른 밭이 오늘은 유난히 돋보인다.


언덕 위에 올라 배낭을 내려놓고 생수와 귤을 몇개 먹었다.
오늘은 간식을 충분히 준비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멀리 온천관광단지가  보인다.
제법 올라왔다.
선선한 바람이 땀을 씻겨준다.


매화와 산수유의 어울림


원좌마을 파수꾼


원좌마을에는 매화를 제법 볼 수 있다.
산수유 마을의 반란인가?


원좌마을을 벗어나 길이라면 무조건 간다.


나무아래 한적하고 양지바른 곳에 벌집통이 늘어서 있다.


산수유 사이사이 고로쇠 나무마다  물을 채취하고 있다.
고로쇠물 채취모습을 처음 본다.
꼼꼼이 살피며 사진 찍을 위치를 잡으려다
발목이 물구덩에 빠지고 말았다.


경치에 취해 무작정 길따라  걷다가
농장 막다른 길에 다다르고 말았다.
시야 확보가 안되어 어디로 헤치고 나아갈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할 수 없이 길을 되돌아 나와 방향을 살핀 후
논두렁을 걸었다.


길이 아니면 헤치고 나아가라.
그리하면 길을 만나리라.
산우유 마을 상위리 쪽을 향하여 헤쳐 나아간다.


반곡리 마을을 지나치며 담장 안쪽도 살폈다.


반월교에 이르러 계곡을 바라보았다.
계곡 주변도 온통 산수유 이다.
멀리 저수지 댐이 보인다.
우측 오르막 길 방향이 상위리, 하위리 산수유 마을 이다.


온천장에서 부터 계속 오르막길 이지만
(나는 길에 관계없이 발 가는대로 가고 있지만)
반월교 부터는 경사가 높아진다.


개나리와 산수유

반월교를 지나면서 학교에서 홀로 돌아오는 소년을 만났다.

소년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소년은 다소 기진하여 가방을 둘러메고 있다.

"오늘 토요일인데 학교 다녀오니?"

"네, 오늘은 학교 가는 날 이예요."

"학교가 멀리인가 보다."

"3km 정도 되요."

"어째서 걸어와?"

"평일에는 공동으로 통학용 택시가 있는데, 토요일은 각자 알아서 해야 해요."

"이곳이 고향이니?"

"우리 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해요."

"마을에 가면 식당은 있니?"

"축제가 끝나서 대부분 떠났지만, 전망대 주변에 아직 있을거예요."
"전망대까지는 둘러 보세요."


나의 질문으로 시작된 대화 끝에 소년이 먼저 말을 한다.


"위아래 찬찬이 보세요. 위에는 점차 색이 흐려지고 아래는 점차 선명해 지거든요." 소년의 말이다.  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이어서  "산수유 축제 때가 꽃색깔이 가장 예뻐요. 이제 축제기간이 지났고 색이 점차 옅어져요. 그러나 개나리가 예쁘게 피고 있어요."


"그렇구나. 산수유와 어우러지니 더욱 예쁜 것 같구나."

"축제가 끝났으면 가을에나 단풍 구경하러 사람들이 많이 오겠구나. 가을에도 멋지겠는걸......"
"우리 동네에는 사람들이 많이와요."
"봄에는 산수유 구경하러 오구요."
"여름에는 계곡물이 시원해서 많이 와요.  우리 집 앞 계곡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해요."
"또 가을에는 단풍구경, 산수유 열매 사러 많이와요."
"이제 집에 다 왔어요."

소년은 버스 타는 곳을 가리키며 말한다.

"가실 때 버스는 저기서 타세요. 나가는 버스가 2시 예요.  버스 놓치면 오후 늦게나 있어요."

집 앞 골목길로 들어서며 소년은 손을 흔든다.

"안녕히 가세요!'
"그래 고맙다. 안녕!" 하며 나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소년과 헤어진 후,  도로를 벗어나 계곡 옆으로 조성된 산책로를 만났다.
산책로로 접어들어 계곡아래 펼쳐지는 풍경을 살피지만
다리에 통증이 느껴지고
배낭의 무게도 느껴진다.


계곡 건너편  산수유 사이로 홍매화, 백매화 세 그루가 만개하여 뽐낸다.
지나가는 분들이 계곡아래로 내려가 촬영에 여념없다.
나는 산책로에 주저앉아 살펴 볼 뿐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주저앉자 감상할 뿐이다.


다소 지친 나는 흐르는 물에 시원함을 느낀다.


다시 도로와 만나기 위해 오르는 계단길
지나가는 사람이 많아 기다려야 했다.


다시 만난 안내판

반월교 옆에도 같은 안내판이 있다.

그러나 그 안내판에는 "하위리"까지 포함되었지만
이 안내판은 "상위리"만 표시되어 있다.

버스가 온천장에 다가 올 무렵 주민에게 길을 물으니
어느 마을을 가라고 일러준다.
그때 버스기사가 "종점에서 내리세요." 라며 말을 가로채더니
다시 종점에서 손짓으로 길을 가리키며
"저곳이 제일 낫습니다." 했다.

저곳이 바로 이곳, 상동(상위리) 마을을 가리키는 말이다.



상동 마을 유채꽃의 다양한 모습들이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하위" 마을
상위마을과 하위마을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있을 뿐 이다.


전망대에서 바라 본 모습

멀리 온천관광단지가 어렴풋이 보인다.
그곳에서 부터 원좌리, 반곡리 등을 돌고돌아 이 자리까지 왔다.


전망대

이곳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다시 쉬어야 했다.

다리가 심상치 않다.
사실, 상위마을 상위교에서 계곡을 따라 더욱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멈추어 쉬며 다리 근육을 풀어야 했다.


남도여행 떠나와 처음 내 모습이다.
여분의 디카로 부탁했다.
배낭에 무게를 느껴 허리도 꾸부정하고 다리도 꾸부정한 내모습


상위교 위에서 계곡 위 아래를 살피며 본 모습

"상위교"옆 정자의 전기콘센트에 디카 건전지 충전을 시켜두고 
여분의 카메라로 주변을 살폈다.
아직 버스 시간이 여유 있으나 계속 걷기에 무리라고 판단해 쉬면서 주변만을 맴돌았다.

       

오늘은 산수유 마을을 다녀와 구례에서 섬진강 따라 하동방면으로 헤질녘까지 걸어 갈 예정이었다.  걷다가 만나는 숙소에서 멈추고 내일 계속 섬진강 따라 걸어서 남하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왼쪽발 장딴지 아래 근육통으로 일정을 수정했다.

구례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며 주민에게 섬진강옆 19번 국도와 861번 지방도 양측  어느방면의 경치가 좋을지 물어 보았으나 시원스런 답을 얻을 수 없다. 하여 다리의 피로도 풀겸 버스편으로 하동으로 이동하며 주변 여건을 살피기로 했다. 
버스로 이동하며  필요한 메모를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하동 벚꽃축제가 어제 금요일 부터 일요일까지 라서 그런지 구례를 떠난 버스는 19번 도로를 벗어나  간전교를 건너 861 지방도로 우회한다.  버스기사 예상대로 861번 도로에서 건너다 본 19번 도로는 주차장이다.  섬진강변 19번, 861번 도로는 벚꽃길 임에도 불구하고 금년 봄은 일기가 순탄치 않아 아직까지 벗꽃이 몽우리졌을 뿐이다.  주민들 말에 의하면 벚꽃 만개가 예년보다 3~4일 늦다고 한 말이 실감 난다.


하동에 도착하니 걷기조차 힘들다.  터미널 주변 병원을 찾으니 토요일 오후인지라 모두 문을 닫았다. 
숙소의 아주머님이 일러주신대로 안티프라민으로 계속 맛사지 하며 내일 여정을 준비했다.


섬진강변 모습

멀리 화개장터앞  남도대교

이 사진은 하동 내려 가던 날의 이틀후 모습이다.

계속....(화개장터까지 걸어서 50리길)

황소생각의 하늘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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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소생각
(2010 남도여행 포스트 4)

약 5kg 정도의 배낭을 메고 조계산을 넘었지만  선암사에 당도 했을 때는 다소 지친 상태다.
하여, 보다 꼼꼼이 살펴보지 못했고, 차밭과 다원등을 들러 차 한잔 하지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먼저, 결론부터 시작하자면 처음으로  선암사를 찾은 나에게, 다른 사찰과는 특이한 점이 몇가지 눈에 띈다.

첫째, 사찰 건축물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오래된 고택(古宅)의 냄새를 풍긴다는 점이다.
말미에 선암사의 유래를 덧붙이겠지만 유독 수차례의 대형화재를 겪은 탓인지 전각들 대부분이 전면 증축되거나 개축되지 않고 보수가 필요한 부분들만 조금씩 손보아지며 가꾸어진 덕택에 다른 절들과는 확연히 다른 격조와 고풍스러움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 건축물의 처마, 기둥과 보에 채색되지 않았고 외벽도 흰색으로 두어 화려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둘째, 마치 큰 저택의 정원을 보는 것 같다. 
선암사는 역사 만큼이나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청정하고 아름다운 산사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선암사는 가람 전체가 경사지에 차례 차례 축대를 쌓아가며 밀도있게 배치한 공간구성으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전각과 전각 사이의 화단에는 80여종이나 되는 갖가지 꽃나무가 경내를 치장하고 있다. 

셋째, 크고 작은 연못이 많다는 점이다.
여느 사찰 경내에서 보기드문 연못이 건축물과 고목(古木), 꽃나무가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더 해준다.  특히 연못에도 특징이 있다.  반드시 중앙에 조형물 등이 있다.

넷째. 사찰의 역사만큼이나 다도(茶道)가 발달했다. 
운길산 수종사에서도 찾아오는 나그네를 위해 차를 마실 수 있도록 하고 있고, 스님들께서 차를 즐기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선암사의 경우는 사찰인지 다원인지 분간 못할 정도이다.

다섯째. 사찰의 배치가 특이하다. 
대부분 사찰이 일주문을 통과하면 사대천왕과 누문(강선루)을 거치는 구조인데 선암사에 사대천왕은 보이지 않고 누문도 일주문 보다 앞서 배치되어 있다. 

이상이 내가 본 선암사의 특징이고, 이제 나의 동선에 따라 선암사를 둘러보겠다.

송광사에서 오후 1시경 출발하여 4시 30분경 절의 안쪽에 위치한 객승이나 신도들이 묵는 해천당과 대중들이 공양하는 적묵당 사잇길에 당도했다. 예정보다 30분이 지연되었다.  통상 사찰을 가는 경우 일주문부터 들어가기 마련인데 선암사는 뒷문으로 들어가는 꼴이 되었다.



적묵당 담장
적묵당은 대중이 공양하는 곳이다.



사찰경내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인상적인 느낌이다.
절의 화려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시야에 들어오는 사찰 건물 외벽에서 채색이나 탱화등 어느 모습도 눈에 띄지 않는다.
사찰이라기 보다는 오래된 고택(古宅)의 느낌이다.



혜전당
방문승려(객승)나 신도가 묵는 곳이다.
고택의 느낌이 역력하다.
벚꽃은 아직도 꽃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뭔, 건물인고? 
톡특한 모양의 건축물이 눈길을 끈다.
자세히 보니 "해우소"라 말하는 선안사 측간(仙岩寺 厠間)이다.

예로부터 가풍을 알려면 화장실과 부엌을 보라고 했는데, 옛날식 가로쓰기로 ‘ㅅ간뒤’라고 쓰인 표지판이 붙어 있어 흔히 ‘깐뒤’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이 화장실은 크고 깔끔한 데다가 고풍스러운 아름다움까지 지니고 있어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사찰 화장실로 꼽힌다.

자연지형의 고저차를 지혜롭게 이용한 이 측간은 앞면 6칸, 옆면 4칸의 맞배지붕이며 丁자형 구조이다.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1920년 이전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한참 고개를 들고 올려다 보았다.
사찰의 망루같다. 이와 같은 크고 작은 고목들이 사찰내에 두루 자리잡고 있다.



와송 (臥松)

선암사의 기이한 명물만큼 관리에도 정성이 엿보인다.
와송을 보는 순간 입이 쩍 벌어지고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연못 가운데 자그마한 동자상
선암사의 또다른 특징은 크고 작은 연못이 많이 눈에 띈다.
다른 사찰들과 비교된다.



사찰 건축물 외부 모습
연등이 아니면 사찰이라 할 수 없을 모습이다.




멀리서 본 또다른 연못이다.
연못 가운데 조형물이 특이하여 가까이 다가섰다.
등짐 진 사람의 뒷모습 같다.
고택과 고목, 특이한 연못이 어느 선비집 같다.



처마에 채색되지 않은 자연상태이고  벽면에 그림도 없다.



원통전

원통각이 지어진 내력
조선 숙종 때 선암사 중창불사를 하던 호암대사는 불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자 몸을 공양할 결심으로 산 위에 있는 배바위에서 아래로 몸을 던졌다. 이때 코끼리를 탄 여인이 하늘에서 내려와 보자기로 호암대사를 받아 다시 배바위에 올려놓은 뒤 “떨어지면 죽는 것인데, 어찌 무모한 짓을 하는가?” 하고 꾸짖은 뒤 사라졌다고 한다. 그후 이 여인이 관세음보살인 것을 뒤늦게 깨달은 호암대사는 친견한 관세음보살의 모습대로 불상을 조성하여 丁자각 형태의 원통각을 짓고 이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한편, 후사가 없던 정조는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순조이다. 순조는 자신이 태어나게 된 데 보답한다는 뜻으로 선암사에 <큰 복의 밭>이라는 의미의 대복전(大福田)이라는 현판을 써주었다고 한다.  이 현판은 지금도 원통각에 걸려 있다. 후에 다시 천(天)과 인(人)자를 한 자씩 더 써주었다고 하는데, 두 글자의 편액은 선암사에서 따로 보관하고 있다.



600년 선암매

선암사 선암매는 원통전, 각황전을 따라 운수암으로 오르는 담길에 50주 정도가 위치한다.  원통전 담장 뒤편의 백매화와 각황전 담길의 홍매화가 천연기념물 제488호로 지정되었다.  문헌에 전하는 기록이 없어 수령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사찰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지금으로 부터 약 600여년 전에 천불전 앞의 와송과 함께 심어졌다고 전하고 있어 선암사의 역사와 함께 긴 세월을 지내 왔음을 알 수 있다.

매화꽃이 필 때면 매화를 보기위해 선암사를 찾는다는 말이 있을정도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매화나무 중 생육상태가 가장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 저곳에서 바라 본 600년 선암매







담길따라 늘어선 백매화, 홍매화



연등거리



매화그늘에 가려진 개나리
사찰경내가 잘 가꾸어진 정원이다.



대웅전
큰 규모의 대웅전은 정유재란으로 소실되고 다소 초라해 보인다. 
앞마당에 보물 제395호인 삼층석탑 2기가 나란히 서있다.
 


일주문 옆 연못
멀리 측면으로 보이는 것이 일주문이다.



일주문 전면



일주문에서  승선교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동전을 틈틈이 채워두고 있다.



일주문옆 연못에서 넘치는 물이 흐르는 물길이다.
지붕만 보이는 것은 성보박물관
 


강선루, 승선교로 내려가는 길목
선암사를 창건할 당시 양쪽 옆은 차밭 이었다고 한다.



하마비

하마비(下馬碑)가 있는 절은 흔치 않다.
말에서 내리라는 표시가 바로 하마비인데, 요즘말로 하면 ‘차에서 내려 걸어가는 장소’ 정도 되겠다.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이 차를 갖고 있어, 쉽게 차를 타고 다니지만, 옛날 말을 탄 사람들은 높은 신분이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말에서 내리라고 넌지시 얘기하는 하마비는 아무 곳에나 세워지는 것은 아니고, 왕권과 관계되는 또는 왕의 명으로 만들게 되는 유적에 하마비를 세워서 왕권이 지엄함을 나타냈다.

송광사와 선암사 일주문 앞에는 모두 하마비가 있다.
송광사는 고종의 명패를 봉안하고 장수를 빌었던 곳이었고, 선암사는 앞서 언급했듯이 정조가 백일기도로 순조를 낳은 곳이다.

조선시대엔 유생들이 사찰을 끼고 있는 산에 오를 때 스님을 가마꾼으로 이용 하였다고 한다.
말을 타고 함부로 사찰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거만하게 행동했던 모양이다.  절에서는 유생들의 함부로 하는 행동에 대한 대비로 왕실 관련 기도처를 만들려고 노력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예나 지금이나 거드름 피우는 사람이 항상 존재하는 모양이다. 지금도 입구에 하마비가 있는 사찰은 왕실의 기도처가 있는 곳으로 유생들의 횡포가 조금이나마 덜 했던 곳입니다.
 



삼인당(三印塘)

타원형의 연못이다.
이 연못은 특이하게도 한 가운데에 알 모양의 섬이 하나 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양식으로서
삼법인(三法印:諸行無常印, 諸法無我印, 涅槃寂靜印)의

심오한 불교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강선루 뒷면



강선루 앞면

강선루는 사찰출입용 문루이다.
중층의 누각으로 1층은 정면, 측면 모두 1간으로 구성하고 2층은 정면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었다. 대부분 사찰의 누문이 일주문 안쪽에 위치하는데 선암사는 사찰영역의 입구에 두어 계곡과 어울리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강선루 두 기둥이 계곡에 세워져 건축미를 한껏 보여주고 있다.  올라가는 앞면 편액은 명필가 성당 김돈희(1871~1936)의 글씨이고, 반대편의 글은 근세 서예가 석방 윤용구(石邦 尹用求, 1853~1936)의 글이다.



승선교

승선교는 조선 숙종 39년인 1713년 만들어진 무지개다리이다.
자연암반 위에 설치하였으나, 세월에는 견디지 못하여 2004년 완전 해체 보수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 되었다.
3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승선교는 길이가 14m, 높이가 7m에 이르는 무지개다리로서 그 절묘한 구성과 조화에 누구나 탄성을 지르게 된다.
훤칠하게 잘 생긴 반원형의 승선교는 다리 아래의 물에 비치어 완전한 원형을 이루고, 이 원형의 안에 계곡 위쪽의 강선루(降仙樓)가 또 물그림자를 비치며 선녀처럼 들어와 앉아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자연으로 그린 한 폭의 그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문득 선암사, 승선교, 강선루...., 

이러한 이름들이 예사로 붙여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선녀의 신비로운 이미지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여러 각도에서 본 승선교와 강선루



옛 승선교 초석
2004년 보수공사시 해체되어 길가에 전시되고 있다.
훼손 정도가 심해  교체한 것들이다.



꼬마 승선교?
승선교 아래에 위치한다.



측백나무들로 둘러 쌓인 선암사의 동부도밭이 나온다.
여기에는 벽파대선사비를 비롯한 8기의 비석과 11기의 부도가 줄지어 서있다.
비석을 받친 모습이 특이하다.


선암사(仙巖寺)의 유래

선암사는 백제성왕 7년인(529)년에 선암사 비로암지에 아도화상(阿度和尙)께서 선암사를 창건하고 사찰명을 해천사(海川寺)라 하고 산명을 청량산(淸凉山)이라 하였다 한다.

그 뒤 도선국사께서 현 가람 위치에 절을 중창하고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지금도 선암사에는 1철불 2보탑 3부도가 전해진다.

이후 선암사는 대각국사 의천이 선암사의 대각암에 주석하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였으며 또한 천태종을 널리 전파하는 호남의 중심사찰 이었다.

선암사도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정유재란 때에 큰 피해를 입는데 모든 전각이 불에 타고 철불, 보탑, 부도, 문수전, 조계문, 청측만이 남았다고 한다.

그후 선암사는 중수를 진행 하였으나 영조 35년(1759) 봄에 다시 화재를 만나 큰 피해를 입게 되어 재건하였고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1761년 산 이름을 청량산, 사찰 명을 해천사로 개칭하였다.

정조 13(1789)년에 정조가 후사가 없자 눌암스님이 선암사 원통전에서,  해붕스님이 대각암에서 100일기도를 하여 1790년 순조가 태어나자 순조는 인천대복전(人天大福田)편액과 은향로, 쌍용문가사, 금병풍, 가마 등을 선암사에 하사 하였다.  그후 순조 23년(1823) 3월 30일 실화로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동의 건물이 다시 불에 타자 다음해부터 6중창불사를 하여 현재의 가람의 규모를 갖추었다. 그리고 산명과 사명을 다시 복칭(複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여순반란사건과 6.25때 소실되는등  화재로 인한 수난을 숱하게 겪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19년 본발사법에 의하여 전국사찰을 30본산으로 지정했을 때 선암사는 전남의 4본산 중 하나로 지정되어 순천,여수,광주지역의 사찰을 관장하였다.

현재의 선암사는 태고종의 유일한 총림인 태고총림(太古叢林)으로서 강원과 선원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종합수도 도량이다.

또한, 선암사는 차(茶)로도 유명하다.
선암사에 처음으로 차를 보급한 분은 도선국사로 선암사 일주문 주변에 차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므로 선암사 차의 역사는 통일신라 말로 선과 함께 같이 보급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계속....(구례의 산수유 마을과 섬진강 줄기 탐색)

황소생각의 하늘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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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남도여행 포스트 3)

먼저, 曹溪山 이름의 내역을 살펴본다.

조계산이란 이름은 송광사선암사에 의해 태어났다.
"송광사지"에 의하면 고려 희종 4년(1209)에 어릴 적부터 존경하던 보조국사가 옛 길상사 터(지금의 송광사)에 수선사를 세우고 승풍쇄신 운동인 정혜결사를 펼친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기뻐하여 "조계산 수선사"라는 편액을 내리고 널리 찬양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조계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한편 1921년에 세운 "선암사 사적비"에는 고려 고종때 대각국사가 중창하고 산의 이름을 조계산으로  바꾸고....  라는 기록도 있다.

아무튼 문헌으로 보아 조계산이 되기 이전에는 선암사측 주봉인 장군봉은 청량산, 송광사측의 효령봉(연산봉)은 송광산이란 각각의 이름으로 불린 것이 사실이며 두 사찰과 산 이름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송광사는  송광산-길상사(신라) -> 송광산-수선사(고려) -> 조계산-송광사(조선),  선암사는 청량산-해천사 -> 청량산-선암사 -> 조계산-선암사으로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

조계산 전경


조계산과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

선암사와 송광사라는 두 거찰을 품고 있는 조계산(884.3m)은 전남 순천시 승주읍과 송광면에 위치하고 있다.
조계산은 비교적 낮은 산으로 산세가 부드럽고 아늑하다. 선암사 둘레에는 월출봉, 장군봉, 깃대봉, 일월석 등이 줄지어 솟아있다.  1979년 12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998년 12월에는 사적 및 명승 제8호로 지정되었다.

정상에서 남해를 바라보는 맛이 그만이다. 좌우의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소장군봉(우측) 연산봉(좌측) 등 조계산 도립공원 전체가 발 아래에 펼쳐진다.
 
송광사와 선암사의 유명세 탓에 절을 찾는 관광객이 사시사철 끊일 새가 없을 뿐더러 등산을 목적으로 조계산을 찾는 사람들도 많다. 조계산 산행은 송광사나 선암사 어느 쪽에서 시작해도 비슷한 시간에 다양한 코스를 즐길 수 있다.  산세가 험하지 않고 평탄한 길이 많아 가족단위 소풍코스로도 알맞다.

지난, 법정스님 다비식에 참석했을 때 송광사의 역사와 아름다움에 매료된 바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슬픔도 간직하고 있었다.  6.25 전쟁 말기 공비들에 의해 송광사에 머물던 많은 노인들이 처참히 학살된 현장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오늘 송광사와 선암사를 품은 조계산을 넘어가며 슬픈 역사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사실, 백령도 천암함의 충격속에 여행길을 나서며 잠시 머뭇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를 찾아 떠난 길인 만큼 용서를 구하는 마음을 가지며 그들의 희생이  왜? 누구를 위하여?  아직까지 계속되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조계산의 슬픈 역사와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이데올로기와 몇몇 인간들의 욕망이 만들어낸 피로 얼룩진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현장을 그린 실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조계산 선암사에서 태어난 작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조계산과 잇닿은 벌교를 중심으로 발단과 전개가 이루어진 것처럼 조계산은 당시 빨치산 활동의 거점이며 통로였음이 분명하다. 70년대 초까지 사람들이 삶의 터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조계산을 드나들 때 빨치산의 은신처에서 구식 총과 실탄들이 발견되었고,  모여든 사람들이 경찰의 부라림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어느 동굴에는 우물이 있다'느니, '사람 뼈가 쌓였다'느니 하며 아는 척하는 이야기로 얘기마당을 돋우었다.

조계산이 소설의 주요무대 배후의 산이라는 사실 이외에도 빨치산의 총사령부가 위치한 지리산으로 부터 확산된 전남 서부지역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통로였다는 점에서 또 다른 "태백산맥"의 깊은 똬리가 숨쉬고 있을 것이다. 현재의 등산로는 어쩌면 그들이 숨가쁘게 달리던 길이었는지 모른다. 

조계산 인근 마을 어른들은 빨치산을 공비라 부른다. 그리고 그때를 잊지 않고 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궁지에 몰리자 자급을 위해 야간에 마을을 기습하므로 낮에는 경찰의 보호아래 농사를 짖고 저녁이면 소와 말 등을 챙겨 "소개"라는 이름의 안전한 마을로 피신하여 밤을 지내는 날을 수없이 보냈다고 한다. 습격과 토벌의 반복, 현장의 세대들은 하나 둘 가고 한 시대를 겪었던 순박한 사람들의 고통의 현장들이 전설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

(조계산인 요삼 점수생의 글 중에서  인용)


다음은 태백산맥 줄거리 이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과 함께 좌익에 의해 장악되었던 벌교가 다시 진압 세력인 군경의 수중에 들어가자 좌익 군당 위원장 염상진은 하대치, 안창민 등과 산 속으로 퇴각한다.  비밀당원으로 상부의 밀명을 받고 벌교로 잠입하게 되는 정하섭은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무당딸 소화를 이용하고, 둘 사이에는 사랑이 싹트는데…… .

한편 염상진의 동생 염상구가 감찰부장으로 있는 청년단은 좌익세력을 처단하는 데 앞장서고, 형 염상진과는 반대의 사상을 지닌 염상구는 빨치산 강동식의 아내 외서댁을 겁탈하는 등 만행을 저지른다. 무고한 사람들까지 피해를 입는 것을 보다못한 벌교의 유지 김범우는 수습위원회 대표 최익승에게 희생을 줄이도록 호소하지만 오히려 빨갱이로 몰리게 되는데…… .


이승만 정권이 농지개혁을 하지 못하자 농민들의 불만은 갈수록 높아지고, 이 과정에서 소작인 강동기는 지주를  삽으로 내리찍고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된다.
반면, 지주 서민영은 자기 소유의 논을 모두 소작인들과 공유하기도 하고, 국군 벌교지구 사령관 심재모로 하여금 모든 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하도록 한다.


1950년 6·25의 발발과 함께 벌교는 다시 염상진 등에 의해 장악되고, 좌익 세력들은 인민의 해방을 감격스럽게 맞이하지만 또다시 살육의 참상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고수하던 김범우와 손승호는 빨치산의 길을 택하게 되지만, 김범우는 미군에게 붙들려 강제로 통역관이 되어 미군들의 부도덕한 행태를 목격하게 된다.

6·25전쟁은 유엔군의 참전과 중국의 개입으로 교착 상태에 빠지고, 전선은 38선 부근에서 대치 상태가 지속된다.
퇴로가 막힌 인민군과 빨치산 세력이 지리산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무장 투쟁을 계속하지만, 군경의 진압 작전에 따라 이들의 투쟁은 점차 무력해지고 염상진은 퇴로가 막히자 부하들과 함께 수류탄으로 자폭한다.

그리고 그의 목이 벌교 읍내에 내걸린다. 염상진이 염원했던 ‘인민해방’은 실패로 끝나지만, 염상진을 추종했던 하대치 등이 살아 남아 염상진의 무덤 앞에서 새로운 투쟁에의 결의를 다지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다."


역사가 소중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슬픈 과거가 반복되지 않기 위함 이기도 하다.
백령도 천안함 사고와 실종 장병들과 희생자를 생각하며 조계산 여정을 시작한다.


천안함 실종자들의 무사기원을 간절히 소원하면서.....,   故 오준위를 애도하면서....



조계산 개략도


나는 송광사 입구에 오전 11시 도착하여 불일암에서 법정스님의 향기에 느낀 후 송광사를 지나
오후 1시경 조계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시장기를 느꼈으나 가진 것이라고는
연양갱 2개와 자유사랑 초코렛 2개, 생수 2개뿐 이다.

이것을 지니고  송광사 - 굴목재 - 보리밥집 - 큰굴목재 - 생태체험장 - 선암사 코스를
선택했다. 약 3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이다.



조계산 등산안내도를 지나 산행길의 시작이다.




조계산에서 진달래 보기가 쉽지 않다.
간혹 나무군락 사이에 홀로 핀 진달래가 간혹 눈에 띈다.
그러기에 더욱 돋보이는지 모르겠다.

계곡에 접어드니 진달래가 아니면 이곳에서 봄기운을 느끼기 어렵다.
삭막 하다고나 할까?



처음만난 다리이다.
제법 튼튼하고 주변과 어울리게 만들었다.




홍(篊)골 이다.
작지만 물 흐르는 소리가 제법이다.



두 번째 다리와 그 위로 세 번째 다리 "토다리"가 보인다.




두 번째 다리에서 계곡을 내려 보았다.




뒤돌아 본 "토다리"
송광사로 부터 약 1KM 지점이다.
"토다리"를 건너기전 옆으로 오르는 길이 연산봉 오르는 길이기도 하다.



"토다리" 지나 얼마가지 않아 얕은 계곡물을 건너야 한다.
허기지고, 목마르고, 다리가 아파 개울물에 발을 담갔다.
원래 발에 땀이 많아 발이 무척 갑갑하기도 했다.

연양갱과 생수로 속을 채운 짧은 시간이지만
계곡물이 무척 시리다.
오래 담글 수가 없다.






발을 닦고 떠나려니 뒤따라 올라온
여인네 무리 속에서 나를 향해 뭐라고 하는 것 같다.
계곡물 소리에 알아 들을 수가 없다.

뭐라했는가 물으니
함께 놀면서 같이 가자고 한다.

못 들은척 돌아서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나의 소중한 여정에 방해받고 싶지 않다.



걸친바위


걸친바위 전설

오랜 옛날 조계산의 호(효)령봉 피아골에는 스님들을 시기하는 마군과 도승이 이웃하여 살았는데 마군은 도승을 쫒아내고 자리를 모두 차지하려고 걸핏하면 시비를 걸고 대결을 벌여 도승을 눌러보려고 하였으나 송광사와 선암사를 수시로 오가는 스님들 때문에 마음 놓고 해볼 수가 없어 궁리 끝에 길을 막아버리면 왕래도 끊기고 사이도 나빠질것이라 생각하고 길이 난 골짜기를 막아버리기 위해 산체만한 바위를 골짜기를 향해 굴렸다고 한다.

도승은 큰 일이 난 것을 알아차리고 잠시 고민 끝에 자그맣고 재빠르게 생긴 괸돌에게 일러 있는 힘을 다해 앞질러가서 반드시 가로 막아야 하니 "자! 부탁한다." 하면서 밀어 보냈다. 주먹만한 돌에게 중얼거리는 도승을 마군이 비웃고 있을 때 어마어마한 바위는 무섭게 굴러갔다.

다행이도 괸 돌은 큰 돌이 내놓은 길을 따라가니 거리가 조금씩 좁혀져 길을 가로막기 직전 아슬아슬한 순간에 괸 돌이 죽기를 무릎쓰고 몸을 날렸고 드디어 부딪히고 깨져 작아진 바위는 우레와 같은 소리를 멈추고 말았다.

(조계산인 요삼 점수생의 글 중에서  인용)




가파른 오르막의 연속이다.
어깨의 배낭도 무거움을 느낀다.
잠시 숨을 깔딱이며 뒤돌아 보았다.

조계산에는 입구의 편백나무 군락을 제외하고
각종 활엽수가 분포하는 것 같다.
나무마다 이름표를 메달아 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르며 나무이름을 메모해 보았다.
오동나무, 굴피나무, 줄참나무, 정금나무, 산벚나무, 참나무,  물푸레나무,
떡갈나무, 고로쇠나무, 느티나무, 박달나무, 나도밤나무, 비목나무, 서어나무,
동백나무, 노락나무, 층층나무, 상수리나무.....
내 눈에는 모두 같은 나무인것 같다. 



굴목재가 시야에 들어왔다.




굴목재 정상이다.
장군봉, 연산봉을 비롯해 갈림길 이기도 하다.




해발 720M 굴목재 표지석




굴목재 나뭇가지에는 지나간 분들이 리본을 메달아 두었다.
차가운 바람결에 흩날리고
그 사이로 멀리 주암호가 내려다 보인다.




옛 숯굽던 가마터.
50년대말까지 조계산에는
숯을 구워 생계를 꾸리던 분들이 많았다고 한다.
등산로 주변에서도 가마터 흔적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배도사  대피소


"배도사(裵道士) 대피소" 이름의 내력

"배도사 대피소"는 83년경에 지어졌다고 한다.
당시에는 조계산을 찾는 등산객이 휴일에도 수십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날이 늘어나는 등산객의 안전을 위하여 첩첩산중인 이곳에 대피소를 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이름없이 대피소 라고만 하였다.

1969년경 광주일고 고교생 여러명이 폭설에 길을 잃어 조난사고로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대피소가 들어선 이듬해 초여름 어느 날, 긴머리 수염에, 훤칠한 체격, 낡은 작업복 차림에 고무신을 신은 기인이 이곳 대피소를 찾아와 안식처 삼아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가 가진 것 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낮이면 산속으로 들어갔고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먹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사람이라곤 가끔식 마주치는 공원순찰 관리인과 "지경터"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조계산 보리밥집 "최석두"씨 부부 정도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최씨 부부와 산중의 이웃으로 조금씩 가까워진 그는 끼니를 같이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말없는 그의 기행이 조금씩 엿보였다.

그의 개인적인 신상은 도저히 알 수 없었으나 카투사 출신이었다고 한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여 간혹 지나가는 외국인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하였다.  언제부턴가 오후가 되면 "배바위" 근처로 올라가서 밤을 보내는 날이 늘어갔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도를 닦는 것이라고 여겼다. 훗날, 그곳은 추운 겨울을 보내기에 적당한 토굴 생활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추측 했다.

산을 찾는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때는 풍수와 사주를 말하기도 하고, 대피소 옆 계곡물을 막아  피래미들이 노니는 모습을 즐기기도 하는 그의 성이 裵씨 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배도사"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대피소도 자연스레 "배도사 대피소"라고 부르게 되었다. 

배도사의 기행이 5~6년쯤 되었을 때 그의 제자가 되기를 자처하는 한 젊은이가 찾아와  제자를 거느린 어엿한 도사가 되어 이후로도 한동안 대피소 생활을 계속한 그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뒤 영영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를 기억하는 조계산 보리밥집 최씨 부부는 그가 만든 대피소 옆 계곡물에서 노니는  피래미를 보며 "양놈들은 원더풀 뷰티풀을 반복하는데 누구네(?)는 매운탕 하면 좋겠다~~." 라고 말하던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

(조계산인 요산 점수생의 글중에서...)




조계산 보리밥집

드디어 보리밥집에 도착했다.
정확히 오후 3시 이다.
허기진 배를 채울 겸 주방 평상에 걸터 앉았다.




보리밥이다.
야채와 배추국 등 순박하고 조촐한 밥상이지만 허기진 나에게는 군침이 돈다.

앞서 먹은 것 이라고는 김포공항 탑승장에서 8시발 비행기에 탑승전 먹은 우동 한 그릇과
산을 오르며 먹은 연양갱과 초코렛이 전부이다.

최씨 부부 젊은 딸이 주방옆 하우스 식당으로
안내했지만 주방에 눌러앉아 먹었다.

도시로 나가지 않고 부모님을 돕는 딸이 이쁘다.




막걸리 반주전자도 주문했다.
쥑인다.
토탈 9천냥이다.




보리밥집 전경

예쁜 아가씨에게 계산하며 물으니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한다.
최씨 부부 딸임에 틀림없다.

맛있게 먹은 나에게 따끈한 숭늉 한 그릇도 내어준다.
푸근한 인심을 느낀다.

이쁜 딸!  멋진 청년 만나기를 바란다.




보리밥집을 나서니 다시 오르막이다.
이정표를 보고 가장 거리가 짧은 "큰굴목재" 길을 택했다.

그러나 오르막에 오르려는 순간 다리에 이상한 증세를 느꼈다.
발목을 높이 들려니 부자연스럽다. 생전 처음있는 현상이다.
배낭을 내리고 가벼운 운동으로 풀었다.




계곡사이 다리이다.
제법 계곡이 깊다.




다리에서 바라 본 정상쪽 계곡




"큰굴목재" 오르는 길
잘 정비되어 있으나 내 다리가 불편하다.
쉬엄쉬엄 올랐다.




" 큰굴목재" 정상
여기도 정상으로 오르는 이정표가 있다.
시야가 좋은 곳으로 올라가 보았다.




비바람에 세월을 머금은 나무들.
떠나기 전, 어제 뉴스에 황사주의보가 있었다.
다행히 황사는 아닌 것 같으나 시야 확보가 안된다.





내려가는 길목에 간혹 눈에 띈다.
뭔 꽃인지 모르겠으나
바위틈, 낙엽사이 간간히 흩어져 핀 꽃에 시선이 끌린다.




호랑이 턱걸이 바위


"호랑이 턱걸이 바위"의 전설

이곳의 절벽처럼 생긴 바위를 아랫마을 사람들은 "호랑이 턱걸이 바위"라 부른다. 옛날 이 바위에는 항상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목을 걸치고 엎드려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이 녀석은 사람들의 심성을 꿰뚫어 보는 영물이어서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구별할 줄 아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이 호랑이가 자리를 지키고 잇을 때 자비로운 스님이나 착한 사람이 올라오면 안심하고 지나가도록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주었고  만약 마음과 행실이 악한 사람이 지나가려고 할라치면 길을 피해주지 않을 뿐 아니라 해치려고 하여, 하는 수 없이 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이 호랑이를 산신령이라고 불렀으며 마음씨 나쁜 사람들은 이 길로 지나갈 엄두도 내지 못했고 호랑이가 턱을 내밀고(걸치고) 있는 바위라 하여 "호랑이 턱걸이 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계산인 요산 점수생의 글중에서...)




산을 내려 갈수록 계곡물은 점점 많아지고
소리도 우렁차다.

이무렵,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않은 젊은 아가씨 둘이 카메라 달랑들고
벌써 지친듯한 모습으로 산을 오른다.

목적지를 물으니 송광사라 한다.
이때가 오후 4시경.
송광사 끝자락에서 출발한지 3시간이 경과했다.

지나온 길과 소요시간을 설명해 주고
무리하지 말것을 당부해 주었다.

산중에는 일찍 저물기 때문에 자칫 위험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오늘 산중에는 인적이 드물기도 했다.




계곡을 거의 내려오니 편백나무 군락이 나타난다.
그리고 앞에는 시야가 트이며 가꾸어진 풍경이 펼쳐진다.
선암사에 다다른것 같다.






이곳이 뭔곳인지 모르고 몇컷 남겼다.
오두막을 배경으로  홀로 핀 진달래를 사진에 담았다.
여느 산처럼 조계산에서 진달래 군락을 목격할 수가 없다. 




편백나무 군락에 들어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내려와 보니 조계산 생태학습장이다.
다 내려왔다.

저쪽으로 선암사 끝자락이 어렴풋이 보인다. 


계속.....(선암사와 600년 선암매)

황소생각의 하늘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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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소생각

  살며 생각하며


역대 마라톤 선수 중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에티오피아의 ‘맨발의 왕자’ 비킬라 아베베입니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에티오피아 국기를 달고 한때 적국이었던 로마의 돌 블럭을 맨발로 달려 영광의 금메달을 획득했던 그는 그다음 올림픽인 64년 동경 올림픽에서도 2시간 12분11초2라는 당시 세계 최고기록으로 또다시 금메달을 거머쥐고 대망의 올림픽 마라톤 2연패를 달성했습니다.

그러나 아베베가 ‘영웅’으로 불리는 것은 단지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기 때문도, 세계기록을 세웠기 때문도 아니라, 그가 희망을 놓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그의 화려한 경력은 우연한 사고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68년 비 내리는 어느 날, 평소처럼 훈련을 마친 아베베가 차를 타고 귀가하던 중 빗길에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사고 발생 10시간 만에 목이 부러지고 척추가 손상된 채 발견됐습니다. 결과는 하반신 마비. 다시는 뛸 수도, 걸을 수도 없게 됐습니다.마라톤 선수의 생명은 뛰고 달리는 두 다리이니 만큼 그의 좌절감과 실망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아베베는 휠체어에 앉아만 있는 ‘장애인’으로서의 생활을 거부했습니다. 두 다리를 사용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새로운 희망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두 다리를 잃었지만 내겐 아직 건강한 두 팔이 있다”며 스스로를 다독인 그는 국내외를 오가며 치료를 병행하며 부지런히 팔 힘을 단련했습니다. 희망을 잃지 않은 노력은 결실을 맺어 70년이 됐을 때, 비킬라 아베베는 세계인들을 다시 한번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노르웨이에서 개최된 25km 눈썰매 크로스컨트리대회에 참가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뿐만 아니라 10km 레이스에서는 특별상을 수상했던 것입니다.

그 후에도 그는 각종 장애인 대회에서 여러 개의 금메달을 획득해 국위를 선양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꿈과 희망을 전하는 희망의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폐허를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항상 피폐하고 황량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시련의 구름 위에 떠 있는 태양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희망을 꿈꾸는 사람만이 그 희망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시련의 구름이 너무 검고 두터워 희망의 태양을 볼 수 없을 때도 있지만 태양은 항상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자리에 있습니다.우리 앞에 놓인 시련은 언젠가는 사라지고 그 위에는 희망이라는 밝게 빛나는 태양이 항상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자료 : 공군본부 정훈공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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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소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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