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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행, 맛집 이야기

또다른 발견, 송광사 여행

(2010 남도여행 포스트 2)

이번 여행길에 다시찾은 송광사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았다.
행운도 따랐고, 궁금증도 풀었다.
 

지난 법정스님의 다비식에 처음찾은 송광사에서는 웅장하고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그때 구석구석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왔던터라
이번에는 구석구석 살펴 볼 요량이었다.   
다시찾아 보니 지난 번에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둘러 보았다.

그러나 불일암에서 법정스님의 향기를 느끼며 접어든 송광사에서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
 
곡선!, 굴곡! 대자연의 참모습이다.
해와 달도 둥글다.
흘러가는 구름도 곡선이다.
흐르는 강물도 굽이굽이 흐른다.
능선도 곡선이다.
모든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도 곡선이다.
곡선에는 아름다움과 부드러움이 있다.
등산길도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어야 수월하지 않은가?

그러나 인간의 마음 만은 직선이다.
고속도로도 부족해 과속한다.
고속승진 하려고 몸무림이다.
일확천금에 눈이멀어 투기를 쫒는다.
한곳만 바라보다 못해 빨리가려 몸부림이다.
마음속에 직선이 지배하고 있다.

법정스님도 과속에서 벗어나자고 했다.
송광사 대웅전의 처마를 올려보며 느낀다. 곡선의 아름다움을...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이다.
대자연으로서 살아보자. 노력하자.
곡선으로 아름답게, 부드럽게 살아가자.


앞서  포스팅한 사진과 같은 것은 대부분 제외하고 포스팅 하였다.



매표소를 지나 볼 수 있는 매화 한 그루가 아니면 지난 3월때와 다름을 느끼지 못할뻔 했다.


계곡에 접어드니 흐르는 물소리가 우렁찰 뿐이다.
어제까지 비가 많이 내렸다고 한다.
걷는 길은 촉촉하여 한결 부드럽다.


불일암을 먼저 둘러보고 산중에 난 오솔길을 따라 송광사로 가는 길목이다.
송광사 율원을  확장하는 것 같다.


송광사 율원의 보조국사비 이다.


송광보조국사비는 고려시대 승려인 보조국사(1158~1210)의  비로서
보조국사 지눌이 출가한 이후의 행적과 업적이 새겨져 있다.
보조국사의 호는 목우자(牧牛子), 법명은 지눌(知訥)이며
시호는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 탑호는 감로(甘露)이다.


출가 전의 성씨는 정씨(鄭氏)로 황해도에서 태어나 8세에 출가하였고
평생을 수선(修禪)에 힘썼으며,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창하였다.


비의 모양은 거북받침돌 위에 비의 몸을 세우고 그 위에 비의 머리
즉, 용틀임머리를 놓았는데, 이는 신라시대부터 유행한 일반형 석비의 양식이다.


이 비는 본디 고려 희종 6년(1210)에 세워졌는데,
이후 조선 숙종 4년(1678)에 다시 세운 것이다.


율원의 출입문이다.
승려외 출입할 수 없는 곳으로 문이 굳게 닫혀있다.
상당히 오래된듯 세월을 느끼게 한다.


율원 앞으로는 편백나무 숲과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진입로 확장을 위해 일부구간이 훼손되고 있어 안타까움을 느꼈다.


법정스님 다비식전날 모셨던 문수전 앞 산수유 이다.
당시와 달리 활짝피었다.
해우소 앞 개나리도 몽우리가 맺혔다.
송광사 계곡이 다른 곳보다 기온이 낮은 듯하다.


다시봐도 아름다운 곳이다.
사찰이 아니라면 풍류를  즐기기에 매우 좋은 곳 이련만
이곳이 무엇에 쓰이는 곳인지 궁금했다.

출입금지 구역이라 오늘은 맘먹고  안쪽을 살펴 보았다.
책들로 가득했다.


관음전이다.
관음점 자체도 유서깊은 건축물이다.

오늘은 관음전에 보존 유물중 보물지정 문제로 관련기관에서 심사를 나온 모양이다.
문화재청 실사단 무리에 끼어들어 시치미 때고 내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사방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본래 1903년 성수전으로 세워졌으나
1955년 지금의 관은전으로 바뀌었다.

내부에는 관음상과 칠성탱화(1869년 조성), 제석탱화, 산신탱화,
독성탱화(1907년 조성)를 봉안하였다.


이곳 내부 벽화에 문신들이 허리를 굽히고 불단을 향해 서있는 모습을 그린 것은
고종임금의 명패를 봉안하고 장수를 빌었던 데서 기인한다.


관음전 내부 천정 모습


목조관음보살좌상

지난해 11월 23일 목조관음보살좌상의 속안에서 조선 중기의 유물 다수가 발견되었다.

송광사에서는 관음전 목조관음보살좌상의 금을 다시 입히기 위해 상태를 확인하던 중
조선시대 중기(15~17세기) 유물 450여점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특히,  이번에 발견된 유물들은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발견 예가 적은 것들이어
보존 가치가 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간행한 불경 해설서 등 서책 8종 17권, 의복 2점, 직물 11점,
금속 1점, 유리조각 1점 등 모두 450여 점 유물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이 중 대방광불화엄경합론(大方廣佛華嚴經合論) 73권, 74권, 75권이 발견돼
대각국사 의천이 11세기에 간행한 교장(敎藏ㆍ대장경에 대한 연구 해석서)의
현존 유일본 이었다.

이 서책은 대각국사의 교장을 조선 세조 8년(1462)에 다시 판각해 간행한 판본으로 드러났으며
문화재청은 이 불경을 “불교문화사, 서지학, 인쇄문화사에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복식은 남성용 저고리와 여성용 배자
(褙子ㆍ저고리 위에 덧입는 단추가 없는 짧은 조끼 모양의 옷)

2점이 발견됐다.  각각 경안군과 부인 허씨의 것으로 추정되며
저고리 안쪽에 경안군의 건강을 비는 발원 묵서(墨書ㆍ붓글씨)가 쓰여 있었다.

또 직물편 11점 가운데 확인된 항라(亢羅ㆍ명주ㆍ모시 등으로 짠 여름 옷감)는
지금까지 조사된 것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라고 알려졌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발견된 유물을 문화재로 지정하는 절차를 밟을 계획이며
현재 유물 대부분을 차지하는 다라니(기원을 비는 주문) 등은
다시 복장에 봉안했지만 보존이 필요한 유물은 송광사박물관에서
별도로 보관할 예정이라고 한다.



지난번 둘러보지 못한 경내 뒤편 등을 둘러 보았다.
처마 사이로 올려 본 모습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대웅전을 둘러보며 곡선의 균형미에 흠뻑 취했다.
 

기와지붕 위의 특이한 모습도 보았다.
뒤에 보이는 산의 능선과 한옥의 부드러움이 조화롭다.


한옥구조와 자연의 절묘한 곡선미를 물씬 느낀다.



지붕과 지붕, 담장의 이어짐....



건축과 자연의 아름다운 어울림



지난번 다녀가며 궁금했던 건축물이다.
나 말고도 궁금증을 품은 분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오늘 우연히 궁금증을 풀었다.


** 세월각과 척주당 **


송광시 일주문을 들어서면 아주 작은 두 전각이 서 있다.
이곳이야말로 송광사에서만 만날 수 잇는 성례의 절차와 부활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전각속이 궁금하여 문을 열어보면 한 평 넓이도 못될 좁은 공간엔 눈을 씻고 보아도
아무것도 없어 궁금증만 더한다.


'세월각"(洗月閣)과 "척주당"(滌珠堂), 두 전각의 용도는
법계로 들고자하는 사람(영혼) 이 진정한 부처님의 성역인 우화각을 지나
사천왕문을 들어서기 전에 이곳에서 더럽혀진
영혼을 씻고 들라는 영혼의 목욕탕인 셈이다.

 

세월각은 여성, 척주당은 남성용임을 '세월"과 '척주"라는 단어가
무척이나  고매하고 은근스럽다.

 

여성을 달(月)에 비유한 것은 달은 해에 상대되는 음이니
남성과 음양으로 비교해 그럴듯 싶지만
남성을 해로 표기하지 않고 '주" 즉 구슬로 선택한
것으로 봐서 아무도 월의 의미가 구슬과 견주는 말에서 왔을성 싶다.
 
여성들만이 가지고 있는 달이 무엇일까?
옳아 그렇구나!
달, 그것 말고 무엇이 있으랴.

 

이와 같은 스님네들의 막힘없는 표현의 자유가 감탄스럽다.
은유의 운치를 단순 속으로 묻어버리는 요즈음이라면
남탕 여탕이라 이름 붙이지 않았을까?

 

목욕탕(?)의 배치 또한 절묘하다.
석가모니불과 일직선상에 잇는 척주(사내)는
문을 열면 바로보이는 정면인 반면

 

세월(여성)은 민망할까봐 옆으로 살짝 돌려놓았다.
 
(曹溪山人의  풀이 인용)


대나무 숲을 뒤로하고 이제 선암사로 가기 위해 조계산을 넘어가야 한다.

가자! 재넘어 보리밥 집으로....

계속.....(송광사에서 선암사 가는 길)

황소생각의 하늘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