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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행, 맛집 이야기

선암사와 600년 선암매(仙巖梅)

(2010 남도여행 포스트 4)

약 5kg 정도의 배낭을 메고 조계산을 넘었지만  선암사에 당도 했을 때는 다소 지친 상태다.
하여, 보다 꼼꼼이 살펴보지 못했고, 차밭과 다원등을 들러 차 한잔 하지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먼저, 결론부터 시작하자면 처음으로  선암사를 찾은 나에게, 다른 사찰과는 특이한 점이 몇가지 눈에 띈다.

첫째, 사찰 건축물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오래된 고택(古宅)의 냄새를 풍긴다는 점이다.
말미에 선암사의 유래를 덧붙이겠지만 유독 수차례의 대형화재를 겪은 탓인지 전각들 대부분이 전면 증축되거나 개축되지 않고 보수가 필요한 부분들만 조금씩 손보아지며 가꾸어진 덕택에 다른 절들과는 확연히 다른 격조와 고풍스러움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 건축물의 처마, 기둥과 보에 채색되지 않았고 외벽도 흰색으로 두어 화려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둘째, 마치 큰 저택의 정원을 보는 것 같다. 
선암사는 역사 만큼이나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청정하고 아름다운 산사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선암사는 가람 전체가 경사지에 차례 차례 축대를 쌓아가며 밀도있게 배치한 공간구성으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전각과 전각 사이의 화단에는 80여종이나 되는 갖가지 꽃나무가 경내를 치장하고 있다. 

셋째, 크고 작은 연못이 많다는 점이다.
여느 사찰 경내에서 보기드문 연못이 건축물과 고목(古木), 꽃나무가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더 해준다.  특히 연못에도 특징이 있다.  반드시 중앙에 조형물 등이 있다.

넷째. 사찰의 역사만큼이나 다도(茶道)가 발달했다. 
운길산 수종사에서도 찾아오는 나그네를 위해 차를 마실 수 있도록 하고 있고, 스님들께서 차를 즐기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선암사의 경우는 사찰인지 다원인지 분간 못할 정도이다.

다섯째. 사찰의 배치가 특이하다. 
대부분 사찰이 일주문을 통과하면 사대천왕과 누문(강선루)을 거치는 구조인데 선암사에 사대천왕은 보이지 않고 누문도 일주문 보다 앞서 배치되어 있다. 

이상이 내가 본 선암사의 특징이고, 이제 나의 동선에 따라 선암사를 둘러보겠다.

송광사에서 오후 1시경 출발하여 4시 30분경 절의 안쪽에 위치한 객승이나 신도들이 묵는 해천당과 대중들이 공양하는 적묵당 사잇길에 당도했다. 예정보다 30분이 지연되었다.  통상 사찰을 가는 경우 일주문부터 들어가기 마련인데 선암사는 뒷문으로 들어가는 꼴이 되었다.



적묵당 담장
적묵당은 대중이 공양하는 곳이다.



사찰경내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인상적인 느낌이다.
절의 화려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시야에 들어오는 사찰 건물 외벽에서 채색이나 탱화등 어느 모습도 눈에 띄지 않는다.
사찰이라기 보다는 오래된 고택(古宅)의 느낌이다.



혜전당
방문승려(객승)나 신도가 묵는 곳이다.
고택의 느낌이 역력하다.
벚꽃은 아직도 꽃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뭔, 건물인고? 
톡특한 모양의 건축물이 눈길을 끈다.
자세히 보니 "해우소"라 말하는 선안사 측간(仙岩寺 厠間)이다.

예로부터 가풍을 알려면 화장실과 부엌을 보라고 했는데, 옛날식 가로쓰기로 ‘ㅅ간뒤’라고 쓰인 표지판이 붙어 있어 흔히 ‘깐뒤’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이 화장실은 크고 깔끔한 데다가 고풍스러운 아름다움까지 지니고 있어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사찰 화장실로 꼽힌다.

자연지형의 고저차를 지혜롭게 이용한 이 측간은 앞면 6칸, 옆면 4칸의 맞배지붕이며 丁자형 구조이다.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1920년 이전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한참 고개를 들고 올려다 보았다.
사찰의 망루같다. 이와 같은 크고 작은 고목들이 사찰내에 두루 자리잡고 있다.



와송 (臥松)

선암사의 기이한 명물만큼 관리에도 정성이 엿보인다.
와송을 보는 순간 입이 쩍 벌어지고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연못 가운데 자그마한 동자상
선암사의 또다른 특징은 크고 작은 연못이 많이 눈에 띈다.
다른 사찰들과 비교된다.



사찰 건축물 외부 모습
연등이 아니면 사찰이라 할 수 없을 모습이다.




멀리서 본 또다른 연못이다.
연못 가운데 조형물이 특이하여 가까이 다가섰다.
등짐 진 사람의 뒷모습 같다.
고택과 고목, 특이한 연못이 어느 선비집 같다.



처마에 채색되지 않은 자연상태이고  벽면에 그림도 없다.



원통전

원통각이 지어진 내력
조선 숙종 때 선암사 중창불사를 하던 호암대사는 불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자 몸을 공양할 결심으로 산 위에 있는 배바위에서 아래로 몸을 던졌다. 이때 코끼리를 탄 여인이 하늘에서 내려와 보자기로 호암대사를 받아 다시 배바위에 올려놓은 뒤 “떨어지면 죽는 것인데, 어찌 무모한 짓을 하는가?” 하고 꾸짖은 뒤 사라졌다고 한다. 그후 이 여인이 관세음보살인 것을 뒤늦게 깨달은 호암대사는 친견한 관세음보살의 모습대로 불상을 조성하여 丁자각 형태의 원통각을 짓고 이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한편, 후사가 없던 정조는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순조이다. 순조는 자신이 태어나게 된 데 보답한다는 뜻으로 선암사에 <큰 복의 밭>이라는 의미의 대복전(大福田)이라는 현판을 써주었다고 한다.  이 현판은 지금도 원통각에 걸려 있다. 후에 다시 천(天)과 인(人)자를 한 자씩 더 써주었다고 하는데, 두 글자의 편액은 선암사에서 따로 보관하고 있다.



600년 선암매

선암사 선암매는 원통전, 각황전을 따라 운수암으로 오르는 담길에 50주 정도가 위치한다.  원통전 담장 뒤편의 백매화와 각황전 담길의 홍매화가 천연기념물 제488호로 지정되었다.  문헌에 전하는 기록이 없어 수령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사찰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지금으로 부터 약 600여년 전에 천불전 앞의 와송과 함께 심어졌다고 전하고 있어 선암사의 역사와 함께 긴 세월을 지내 왔음을 알 수 있다.

매화꽃이 필 때면 매화를 보기위해 선암사를 찾는다는 말이 있을정도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매화나무 중 생육상태가 가장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 저곳에서 바라 본 600년 선암매







담길따라 늘어선 백매화, 홍매화



연등거리



매화그늘에 가려진 개나리
사찰경내가 잘 가꾸어진 정원이다.



대웅전
큰 규모의 대웅전은 정유재란으로 소실되고 다소 초라해 보인다. 
앞마당에 보물 제395호인 삼층석탑 2기가 나란히 서있다.
 


일주문 옆 연못
멀리 측면으로 보이는 것이 일주문이다.



일주문 전면



일주문에서  승선교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동전을 틈틈이 채워두고 있다.



일주문옆 연못에서 넘치는 물이 흐르는 물길이다.
지붕만 보이는 것은 성보박물관
 


강선루, 승선교로 내려가는 길목
선암사를 창건할 당시 양쪽 옆은 차밭 이었다고 한다.



하마비

하마비(下馬碑)가 있는 절은 흔치 않다.
말에서 내리라는 표시가 바로 하마비인데, 요즘말로 하면 ‘차에서 내려 걸어가는 장소’ 정도 되겠다.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이 차를 갖고 있어, 쉽게 차를 타고 다니지만, 옛날 말을 탄 사람들은 높은 신분이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말에서 내리라고 넌지시 얘기하는 하마비는 아무 곳에나 세워지는 것은 아니고, 왕권과 관계되는 또는 왕의 명으로 만들게 되는 유적에 하마비를 세워서 왕권이 지엄함을 나타냈다.

송광사와 선암사 일주문 앞에는 모두 하마비가 있다.
송광사는 고종의 명패를 봉안하고 장수를 빌었던 곳이었고, 선암사는 앞서 언급했듯이 정조가 백일기도로 순조를 낳은 곳이다.

조선시대엔 유생들이 사찰을 끼고 있는 산에 오를 때 스님을 가마꾼으로 이용 하였다고 한다.
말을 타고 함부로 사찰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거만하게 행동했던 모양이다.  절에서는 유생들의 함부로 하는 행동에 대한 대비로 왕실 관련 기도처를 만들려고 노력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예나 지금이나 거드름 피우는 사람이 항상 존재하는 모양이다. 지금도 입구에 하마비가 있는 사찰은 왕실의 기도처가 있는 곳으로 유생들의 횡포가 조금이나마 덜 했던 곳입니다.
 



삼인당(三印塘)

타원형의 연못이다.
이 연못은 특이하게도 한 가운데에 알 모양의 섬이 하나 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양식으로서
삼법인(三法印:諸行無常印, 諸法無我印, 涅槃寂靜印)의

심오한 불교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강선루 뒷면



강선루 앞면

강선루는 사찰출입용 문루이다.
중층의 누각으로 1층은 정면, 측면 모두 1간으로 구성하고 2층은 정면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었다. 대부분 사찰의 누문이 일주문 안쪽에 위치하는데 선암사는 사찰영역의 입구에 두어 계곡과 어울리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강선루 두 기둥이 계곡에 세워져 건축미를 한껏 보여주고 있다.  올라가는 앞면 편액은 명필가 성당 김돈희(1871~1936)의 글씨이고, 반대편의 글은 근세 서예가 석방 윤용구(石邦 尹用求, 1853~1936)의 글이다.



승선교

승선교는 조선 숙종 39년인 1713년 만들어진 무지개다리이다.
자연암반 위에 설치하였으나, 세월에는 견디지 못하여 2004년 완전 해체 보수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 되었다.
3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승선교는 길이가 14m, 높이가 7m에 이르는 무지개다리로서 그 절묘한 구성과 조화에 누구나 탄성을 지르게 된다.
훤칠하게 잘 생긴 반원형의 승선교는 다리 아래의 물에 비치어 완전한 원형을 이루고, 이 원형의 안에 계곡 위쪽의 강선루(降仙樓)가 또 물그림자를 비치며 선녀처럼 들어와 앉아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자연으로 그린 한 폭의 그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문득 선암사, 승선교, 강선루...., 

이러한 이름들이 예사로 붙여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선녀의 신비로운 이미지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여러 각도에서 본 승선교와 강선루



옛 승선교 초석
2004년 보수공사시 해체되어 길가에 전시되고 있다.
훼손 정도가 심해  교체한 것들이다.



꼬마 승선교?
승선교 아래에 위치한다.



측백나무들로 둘러 쌓인 선암사의 동부도밭이 나온다.
여기에는 벽파대선사비를 비롯한 8기의 비석과 11기의 부도가 줄지어 서있다.
비석을 받친 모습이 특이하다.


선암사(仙巖寺)의 유래

선암사는 백제성왕 7년인(529)년에 선암사 비로암지에 아도화상(阿度和尙)께서 선암사를 창건하고 사찰명을 해천사(海川寺)라 하고 산명을 청량산(淸凉山)이라 하였다 한다.

그 뒤 도선국사께서 현 가람 위치에 절을 중창하고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지금도 선암사에는 1철불 2보탑 3부도가 전해진다.

이후 선암사는 대각국사 의천이 선암사의 대각암에 주석하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였으며 또한 천태종을 널리 전파하는 호남의 중심사찰 이었다.

선암사도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정유재란 때에 큰 피해를 입는데 모든 전각이 불에 타고 철불, 보탑, 부도, 문수전, 조계문, 청측만이 남았다고 한다.

그후 선암사는 중수를 진행 하였으나 영조 35년(1759) 봄에 다시 화재를 만나 큰 피해를 입게 되어 재건하였고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1761년 산 이름을 청량산, 사찰 명을 해천사로 개칭하였다.

정조 13(1789)년에 정조가 후사가 없자 눌암스님이 선암사 원통전에서,  해붕스님이 대각암에서 100일기도를 하여 1790년 순조가 태어나자 순조는 인천대복전(人天大福田)편액과 은향로, 쌍용문가사, 금병풍, 가마 등을 선암사에 하사 하였다.  그후 순조 23년(1823) 3월 30일 실화로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동의 건물이 다시 불에 타자 다음해부터 6중창불사를 하여 현재의 가람의 규모를 갖추었다. 그리고 산명과 사명을 다시 복칭(複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여순반란사건과 6.25때 소실되는등  화재로 인한 수난을 숱하게 겪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19년 본발사법에 의하여 전국사찰을 30본산으로 지정했을 때 선암사는 전남의 4본산 중 하나로 지정되어 순천,여수,광주지역의 사찰을 관장하였다.

현재의 선암사는 태고종의 유일한 총림인 태고총림(太古叢林)으로서 강원과 선원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종합수도 도량이다.

또한, 선암사는 차(茶)로도 유명하다.
선암사에 처음으로 차를 보급한 분은 도선국사로 선암사 일주문 주변에 차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므로 선암사 차의 역사는 통일신라 말로 선과 함께 같이 보급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계속....(구례의 산수유 마을과 섬진강 줄기 탐색)

황소생각의 하늘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