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여행, 맛집 이야기

섬진강 물길따라 50리, "토지"의 무대 평사리를 찾아서...

(2010 남도여행 7)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무대 평사리는 하동과 화개장터 50리 길의 중간지점에 위치한다.  섬진강가에 조성된 "평사리 공원"에서 약 2km 정도 들어가 있다. 다리 통증 때문에 높이 올라가야 하는 코스는 모두 포기했으나 이곳 평사리의 "토지" 무대중 "최참판댁"과 드라마 촬영장소였던 부락은  둘러보기로 했다. 그외 "조씨고택"과 "취간림"도 포기했다.

아래 지도를 보면 "최참판댁"이 화개장터에 가까운 곳으로 표시되었으나 사실은 섬진강대교와 화개장터 거의 중간지점이다.


이와 같은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무대 안내판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하동 관광안내 지도

"토지"는 5부 21권으로 구성되었다.
소설을 읽지 못했고 드라마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박경리 선생의 "토지"가 우리나라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작품임은 익히 잘 알고 있던 터에 이곳을 지나칠 수 없다. 섬진강길 줄기따라 펼쳐진 여행지를 살펴보면 구례방면은 "운조루"를 뺄 수 없으나  예상치 못한 왼쪽다리 근육통으로 구례에서 화개장터 구간 40 여리는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광양방면 861번 지방도로의 섬진대교 인근에 "매화마을" 있으나 섬진강 줄기 건너편이라 모두 답사하기는 역부족 이다.  다만 "운조루"에 대한 아쉬움이 있어서 찾아 보았다.


"운조루"의 일부 모습

운조루는 호남의 대표적인 명가 가운데 하나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살림집이다. 운조루의 입향조(入鄕祖)는 조선중기에 무과에 급제한 대구출신의 류이주(柳爾  )라는 사람이다. 경상도에서 삼수 부사를 지낸 후 이곳이 풍수적으로 길지라고 믿고 들어온 곳이기 때문에 조선 후기 터잡기 양식을 파악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운조루는 유이주가 말년을 보내기 위해 지은 집으로 그가 이곳에 들어오게 된 풍수적인 이유는 강 건너 오봉산이 아름답고, 산들이 다섯 가지 모양을 모두 갖추어, 물이 풍부하고, 풍토가 후덕하고, 대기가 사람이 거처하기에 좋다는 다섯 가지였다.

운조루는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위치해 있다. 이 곳 토지면(土旨面)은 과거에 토지(吐指)라고 하여 금가락지를 토했다는 곳이다. 풍수에서 말하는 금가락지가 땅에 떨어진 곳, 즉 금환낙지(金環落地)의 형국이다. 금가락지는 여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정표로서 성행위를 하거나 출산할 때만 빼는 것이었다. 따라서 가락지를 빼내어 땅에 놓는다는 것은 생산을 의미하는데, 이 땅이 풍요와 부귀영화가 샘물처럼 메마르지 않는 명당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운조루가 위치한 오미리는 금환낙지라는 형국과 함께 금거북이 진흙에 묻혀 있는 형국(금구몰니:金龜沒泥形)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금구몰니란 말은 금거북이가 진흙 속에 있다는 말인데, 입향조인 유이주가 돌밭을 일궈 집을 지으면서 거북처럼 생긴 돌이 나와서 금구몰니라는 명당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집은 조선시대 양반가의 대표적인 구조이며 집터는 一자형 하인들의 방(행랑채)과 T자형 사랑채, ㄷ자형의 안채가 있고 대문 안의 행랑채가 서로 연이어져 있고, 안채의 뒷면에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구조양식은 기둥과 기둥 위에 건너 얹어 그 위에 서까래를 놓는 나무인 '도리'와 그 도리를 받치고 있는 모진 나무인 '장어'로만 된 구조(민도리집)로서, 지붕은 사랑채, 안채가 연이어져 있으나 팔각지붕으로 되었다.


"평사리 공원"에 위치한 "섬진강 탄곡" 비

섬진강 이름의 전설

고려말, 왜구들이 섬진강 나루터에 침입해 오자 두꺼비 수십만 마리가 몰려와 울부짖어 왜구들이 그 소리에 놀라 도망을 가게 되었다. 그후에 또 왜구들이 쳐들어 왔을 때는, 우리 병사들이 꼼짝없이 붙들리게 되는 처지가 되었는데 두꺼비 떼가 강물 위로 다리를 놓아 우리병사들을 건네주고, 뒤따라 온 왜구들은 두꺼비들이 그대로 강물 속으로 들어가 버려 모두 빠져 죽게 하였다.  이때부터 "두꺼비 섬(蟾)"자와 "나루 진(津)"자를 써서 "섬진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섬진강변 "평사리 공원"의 여러 모습


평사리 들녘, 멀리 19번 국도 벚꽃길


평사리 "동정호"


평사리 "평사드레 문화교류 센터"

평사리 공원에서 나와 삼거리에서 "최참판 댁"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이곳은 숙박도 가능하다. 그리고 "토지" 무대를 자전거로 돌아 볼 수 있도록 대여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무척 반가웠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는 대여를 하지 않는다. 안전문제로 보험가입을 협의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타결을 보지못해 자전거등 모든 준비를 하고서도 대여를 못하고 있다. 조만간 타결되어 자전거를 이용할 수 있다면 나 같은 여행객에게 무척 반가울 것 같다.


"최참판 댁" 입구에 "박경리 토지 문학비"

박경리 선생은
1926년 경남 통영에서 출생하여 1946년 진주여고를 졸업했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단편 『계산』 등이 『현대문학』에 실리면서 등단했다. 이후 1959년 『표류도』, 1962년 『김약국의 딸들』, 1964년『파시』, 『시장과 전장』 등의 장편을 발표했다. 『토지』는 1969년부터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하여 1972년 9월까지 1부를 집필했다. 『토지』 2부는 같은 해 10월부터 1975년 10월까지 『문학사상』에 3부는 1978년부터 『주부생활』에 4부는 1983년부터 『정경문화』와 『월간경향』에 각각 연재했다.

마지막 5부는 1992년부터 <문화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1994년 8월 15일 마침내 대하소설 『토지』의 전작이 완결되었다. 25년에 걸쳐 원고지 4만 장 분량으로 탈고된 것이다. 한말로부터 식민지 시대를 꿰뚫으며 민족사의 변천을 그리고 있는 대하소설 『토지』는 탈고 전에 이미 한국문학의 걸작으로 자리잡았고 박경리는 한국문학사에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거봉으로 우뚝 섰다.

서점에 확인해 보니 모두 21권으로 모두 읽어보려면 별도의 계획이 필요할 것 같다. 다음 기회로 미루고 줄거리를 찾아 보았으나 워낙 장편이라 짧은 줄거리로 소개하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찾지 못하고 출판사에서 소개하는 내용은 이러하다.

"경남 하동의 평사리를 무대로 하여 5대째 대지주로 군림하고 있는 최참판댁과 그 소작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박경리 대하역사 장편소설. 1860년대부터 시작된 동학운동, 개항과 일본의 세력강화, 갑오개혁 등이 『토지』 전체의 구체적인 전사(前史)가 된다. 동학 장군 김개주와 윤씨 부인에 얽힌 비밀이 차차 풀려나가고, 신분문제와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혀 귀녀와 평산 등이 최치수를 살해하는데... "


"최참판 댁"에 오르는 길목

둘러보는대 약 2시간이 소요되었다.
"토지문학관" 등을 제외하고도 말이다.


기념품점의 지붕을 멋지게 꾸며 놓았다.
푸른 하늘과 흐르는 구름과도 무척 어울린다.


길목에 위치한 우물


손님을 기다리는 우마차

매표소를 지나면 차량통행이 제한된다.
노인을 위해 전동차량이 눈에 뜨인다. 그리고 우마차도 보인다. 매우 한가롭고 멀리 평사리 들판이 내려다 보인다. 그 뒤로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 줄기

평사리 "최참판댁"과 조선후기 서민의 주거환경 모습

지리산 거대한 능선이 남으로 가지를 친 남부능선의 대미에 해당되는 성제봉 아래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진다. 미점리 아미산 아래에서 동정호까지의 넓은 들판, 만석지기 부자를 서넛은 낼만한 악양 '무딤이들'이 그것이다.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토지」의 무대로 유명한 악양 평사리는 섬진강이 주는 혜택을 한 몸에 받은 땅이다. 평사리가 위치한 지명인 악양은 중국의 악양과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중국에 있는 지명을 따와서 평사리 강변 모래밭을 금당이라 하고 모래밭 안에 있는 호수를 "동정호"라 했다.

악양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 중에 소상팔경이 있으며, 평사리들에 위치한 동정호와 악양의 소상팔경은 이곳 사람들의 자랑거리로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가득 담긴 풍경을 자아낸다. 또한 형제봉 중턱 300m에 위치한 사적 제151호 "고소성"은 신라시대 축성한 것으로 섬진강과 동정호를 발아래 두고 천년의 발자취를 말해준다.

동학혁명에서 근대사까지 우리 한민족의 대서사시인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인 이곳 평사리에 소설속의 최참판댁이 한옥 14동으로 구현되었으며, 조선후기 우리민족의 생활모습을 재현해 놓은 토지세트장이 잘 조성되어 있고 인근의 평사리 문학관도 좋은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 매년 가을이면 전국문인들의 문학축제인 토지문학제가 이곳에서 개최되어 문학마을로서 자리매김 될 것 같다.


"최참판 댁" 주변 마을

드라마 촬영목적으로 지어져 지금은 수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토지 문학관" 입구의 대나무 숲


"최참판댁" 누각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간식도 먹으며 디카의 메모리 확보를 위해 노트북으로 옮겨 두었다.
햇볕은 매우 따사로우나 봄바람이 무척 선선하다. 촉촉이 젖은 옷사이로 부는 바람이 싸늘함 마저 느끼게 한다.
멀리 내려다 보이는 평사리 들녘과 섬진강 줄기를 바라보며 나도 최참판이 되어 보았다.


최참판댁 구석구석을 살폈다.
옛 정취도 느꼈다.


"최참판댁"을 2시간여 둘러보고 나오는 길목, 갈대숲

"평사드레 문화교류 센터"앞에서 국밥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도로를 벗어나 하천 뚝방 위의 갈대숲을 헤치며 19번 국도로 나아갔다. 시간을 보니 오후 1시가 되었다. "최참판 댁" 뒤로는 "고소산성"이 있다. 섬진강을 조망하기에 무척 적절한 곳이고 그리 높지 않으나 다리 근육통으로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포기해야만 했다.


고소산성

고소성의 유래

이 성은 지리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의 중복 3백m의 형제봉 고지에 위치하고 있다. 동북은 준령을 등지고 서남으로는 섬진강과 동정호를 발밑에 둔 천연의 요충으로 남해에서 호남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목을 쥐고 있는 형세에 놓여 있다. 성은 이와 같은 지리를 이용하여 산복의 능선에 축성한 석성이다. 성벽은 둘레 약 8백m, 높이 3.5~4.5m이고 그 단면이 사다리형(저면 폭 6m, 상면 폭2m)인데 가공한 장방형 석재를 써서 견고하게 쌓고 남북에 두 개의 성문을 설치하였다.

계속...(화개 벚꽃십리길)
황소생각의 하늘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