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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행, 맛집 이야기

송광사에서 선암사 가는 길, 조계산 자락

(2010 남도여행 포스트 3)

먼저, 曹溪山 이름의 내역을 살펴본다.

조계산이란 이름은 송광사선암사에 의해 태어났다.
"송광사지"에 의하면 고려 희종 4년(1209)에 어릴 적부터 존경하던 보조국사가 옛 길상사 터(지금의 송광사)에 수선사를 세우고 승풍쇄신 운동인 정혜결사를 펼친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기뻐하여 "조계산 수선사"라는 편액을 내리고 널리 찬양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조계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한편 1921년에 세운 "선암사 사적비"에는 고려 고종때 대각국사가 중창하고 산의 이름을 조계산으로  바꾸고....  라는 기록도 있다.

아무튼 문헌으로 보아 조계산이 되기 이전에는 선암사측 주봉인 장군봉은 청량산, 송광사측의 효령봉(연산봉)은 송광산이란 각각의 이름으로 불린 것이 사실이며 두 사찰과 산 이름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송광사는  송광산-길상사(신라) -> 송광산-수선사(고려) -> 조계산-송광사(조선),  선암사는 청량산-해천사 -> 청량산-선암사 -> 조계산-선암사으로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

조계산 전경


조계산과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

선암사와 송광사라는 두 거찰을 품고 있는 조계산(884.3m)은 전남 순천시 승주읍과 송광면에 위치하고 있다.
조계산은 비교적 낮은 산으로 산세가 부드럽고 아늑하다. 선암사 둘레에는 월출봉, 장군봉, 깃대봉, 일월석 등이 줄지어 솟아있다.  1979년 12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998년 12월에는 사적 및 명승 제8호로 지정되었다.

정상에서 남해를 바라보는 맛이 그만이다. 좌우의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소장군봉(우측) 연산봉(좌측) 등 조계산 도립공원 전체가 발 아래에 펼쳐진다.
 
송광사와 선암사의 유명세 탓에 절을 찾는 관광객이 사시사철 끊일 새가 없을 뿐더러 등산을 목적으로 조계산을 찾는 사람들도 많다. 조계산 산행은 송광사나 선암사 어느 쪽에서 시작해도 비슷한 시간에 다양한 코스를 즐길 수 있다.  산세가 험하지 않고 평탄한 길이 많아 가족단위 소풍코스로도 알맞다.

지난, 법정스님 다비식에 참석했을 때 송광사의 역사와 아름다움에 매료된 바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슬픔도 간직하고 있었다.  6.25 전쟁 말기 공비들에 의해 송광사에 머물던 많은 노인들이 처참히 학살된 현장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오늘 송광사와 선암사를 품은 조계산을 넘어가며 슬픈 역사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사실, 백령도 천암함의 충격속에 여행길을 나서며 잠시 머뭇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를 찾아 떠난 길인 만큼 용서를 구하는 마음을 가지며 그들의 희생이  왜? 누구를 위하여?  아직까지 계속되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조계산의 슬픈 역사와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이데올로기와 몇몇 인간들의 욕망이 만들어낸 피로 얼룩진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현장을 그린 실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조계산 선암사에서 태어난 작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조계산과 잇닿은 벌교를 중심으로 발단과 전개가 이루어진 것처럼 조계산은 당시 빨치산 활동의 거점이며 통로였음이 분명하다. 70년대 초까지 사람들이 삶의 터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조계산을 드나들 때 빨치산의 은신처에서 구식 총과 실탄들이 발견되었고,  모여든 사람들이 경찰의 부라림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어느 동굴에는 우물이 있다'느니, '사람 뼈가 쌓였다'느니 하며 아는 척하는 이야기로 얘기마당을 돋우었다.

조계산이 소설의 주요무대 배후의 산이라는 사실 이외에도 빨치산의 총사령부가 위치한 지리산으로 부터 확산된 전남 서부지역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통로였다는 점에서 또 다른 "태백산맥"의 깊은 똬리가 숨쉬고 있을 것이다. 현재의 등산로는 어쩌면 그들이 숨가쁘게 달리던 길이었는지 모른다. 

조계산 인근 마을 어른들은 빨치산을 공비라 부른다. 그리고 그때를 잊지 않고 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궁지에 몰리자 자급을 위해 야간에 마을을 기습하므로 낮에는 경찰의 보호아래 농사를 짖고 저녁이면 소와 말 등을 챙겨 "소개"라는 이름의 안전한 마을로 피신하여 밤을 지내는 날을 수없이 보냈다고 한다. 습격과 토벌의 반복, 현장의 세대들은 하나 둘 가고 한 시대를 겪었던 순박한 사람들의 고통의 현장들이 전설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

(조계산인 요삼 점수생의 글 중에서  인용)


다음은 태백산맥 줄거리 이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과 함께 좌익에 의해 장악되었던 벌교가 다시 진압 세력인 군경의 수중에 들어가자 좌익 군당 위원장 염상진은 하대치, 안창민 등과 산 속으로 퇴각한다.  비밀당원으로 상부의 밀명을 받고 벌교로 잠입하게 되는 정하섭은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무당딸 소화를 이용하고, 둘 사이에는 사랑이 싹트는데…… .

한편 염상진의 동생 염상구가 감찰부장으로 있는 청년단은 좌익세력을 처단하는 데 앞장서고, 형 염상진과는 반대의 사상을 지닌 염상구는 빨치산 강동식의 아내 외서댁을 겁탈하는 등 만행을 저지른다. 무고한 사람들까지 피해를 입는 것을 보다못한 벌교의 유지 김범우는 수습위원회 대표 최익승에게 희생을 줄이도록 호소하지만 오히려 빨갱이로 몰리게 되는데…… .


이승만 정권이 농지개혁을 하지 못하자 농민들의 불만은 갈수록 높아지고, 이 과정에서 소작인 강동기는 지주를  삽으로 내리찍고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된다.
반면, 지주 서민영은 자기 소유의 논을 모두 소작인들과 공유하기도 하고, 국군 벌교지구 사령관 심재모로 하여금 모든 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하도록 한다.


1950년 6·25의 발발과 함께 벌교는 다시 염상진 등에 의해 장악되고, 좌익 세력들은 인민의 해방을 감격스럽게 맞이하지만 또다시 살육의 참상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고수하던 김범우와 손승호는 빨치산의 길을 택하게 되지만, 김범우는 미군에게 붙들려 강제로 통역관이 되어 미군들의 부도덕한 행태를 목격하게 된다.

6·25전쟁은 유엔군의 참전과 중국의 개입으로 교착 상태에 빠지고, 전선은 38선 부근에서 대치 상태가 지속된다.
퇴로가 막힌 인민군과 빨치산 세력이 지리산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무장 투쟁을 계속하지만, 군경의 진압 작전에 따라 이들의 투쟁은 점차 무력해지고 염상진은 퇴로가 막히자 부하들과 함께 수류탄으로 자폭한다.

그리고 그의 목이 벌교 읍내에 내걸린다. 염상진이 염원했던 ‘인민해방’은 실패로 끝나지만, 염상진을 추종했던 하대치 등이 살아 남아 염상진의 무덤 앞에서 새로운 투쟁에의 결의를 다지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다."


역사가 소중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슬픈 과거가 반복되지 않기 위함 이기도 하다.
백령도 천안함 사고와 실종 장병들과 희생자를 생각하며 조계산 여정을 시작한다.


천안함 실종자들의 무사기원을 간절히 소원하면서.....,   故 오준위를 애도하면서....



조계산 개략도


나는 송광사 입구에 오전 11시 도착하여 불일암에서 법정스님의 향기에 느낀 후 송광사를 지나
오후 1시경 조계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시장기를 느꼈으나 가진 것이라고는
연양갱 2개와 자유사랑 초코렛 2개, 생수 2개뿐 이다.

이것을 지니고  송광사 - 굴목재 - 보리밥집 - 큰굴목재 - 생태체험장 - 선암사 코스를
선택했다. 약 3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이다.



조계산 등산안내도를 지나 산행길의 시작이다.




조계산에서 진달래 보기가 쉽지 않다.
간혹 나무군락 사이에 홀로 핀 진달래가 간혹 눈에 띈다.
그러기에 더욱 돋보이는지 모르겠다.

계곡에 접어드니 진달래가 아니면 이곳에서 봄기운을 느끼기 어렵다.
삭막 하다고나 할까?



처음만난 다리이다.
제법 튼튼하고 주변과 어울리게 만들었다.




홍(篊)골 이다.
작지만 물 흐르는 소리가 제법이다.



두 번째 다리와 그 위로 세 번째 다리 "토다리"가 보인다.




두 번째 다리에서 계곡을 내려 보았다.




뒤돌아 본 "토다리"
송광사로 부터 약 1KM 지점이다.
"토다리"를 건너기전 옆으로 오르는 길이 연산봉 오르는 길이기도 하다.



"토다리" 지나 얼마가지 않아 얕은 계곡물을 건너야 한다.
허기지고, 목마르고, 다리가 아파 개울물에 발을 담갔다.
원래 발에 땀이 많아 발이 무척 갑갑하기도 했다.

연양갱과 생수로 속을 채운 짧은 시간이지만
계곡물이 무척 시리다.
오래 담글 수가 없다.






발을 닦고 떠나려니 뒤따라 올라온
여인네 무리 속에서 나를 향해 뭐라고 하는 것 같다.
계곡물 소리에 알아 들을 수가 없다.

뭐라했는가 물으니
함께 놀면서 같이 가자고 한다.

못 들은척 돌아서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나의 소중한 여정에 방해받고 싶지 않다.



걸친바위


걸친바위 전설

오랜 옛날 조계산의 호(효)령봉 피아골에는 스님들을 시기하는 마군과 도승이 이웃하여 살았는데 마군은 도승을 쫒아내고 자리를 모두 차지하려고 걸핏하면 시비를 걸고 대결을 벌여 도승을 눌러보려고 하였으나 송광사와 선암사를 수시로 오가는 스님들 때문에 마음 놓고 해볼 수가 없어 궁리 끝에 길을 막아버리면 왕래도 끊기고 사이도 나빠질것이라 생각하고 길이 난 골짜기를 막아버리기 위해 산체만한 바위를 골짜기를 향해 굴렸다고 한다.

도승은 큰 일이 난 것을 알아차리고 잠시 고민 끝에 자그맣고 재빠르게 생긴 괸돌에게 일러 있는 힘을 다해 앞질러가서 반드시 가로 막아야 하니 "자! 부탁한다." 하면서 밀어 보냈다. 주먹만한 돌에게 중얼거리는 도승을 마군이 비웃고 있을 때 어마어마한 바위는 무섭게 굴러갔다.

다행이도 괸 돌은 큰 돌이 내놓은 길을 따라가니 거리가 조금씩 좁혀져 길을 가로막기 직전 아슬아슬한 순간에 괸 돌이 죽기를 무릎쓰고 몸을 날렸고 드디어 부딪히고 깨져 작아진 바위는 우레와 같은 소리를 멈추고 말았다.

(조계산인 요삼 점수생의 글 중에서  인용)




가파른 오르막의 연속이다.
어깨의 배낭도 무거움을 느낀다.
잠시 숨을 깔딱이며 뒤돌아 보았다.

조계산에는 입구의 편백나무 군락을 제외하고
각종 활엽수가 분포하는 것 같다.
나무마다 이름표를 메달아 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르며 나무이름을 메모해 보았다.
오동나무, 굴피나무, 줄참나무, 정금나무, 산벚나무, 참나무,  물푸레나무,
떡갈나무, 고로쇠나무, 느티나무, 박달나무, 나도밤나무, 비목나무, 서어나무,
동백나무, 노락나무, 층층나무, 상수리나무.....
내 눈에는 모두 같은 나무인것 같다. 



굴목재가 시야에 들어왔다.




굴목재 정상이다.
장군봉, 연산봉을 비롯해 갈림길 이기도 하다.




해발 720M 굴목재 표지석




굴목재 나뭇가지에는 지나간 분들이 리본을 메달아 두었다.
차가운 바람결에 흩날리고
그 사이로 멀리 주암호가 내려다 보인다.




옛 숯굽던 가마터.
50년대말까지 조계산에는
숯을 구워 생계를 꾸리던 분들이 많았다고 한다.
등산로 주변에서도 가마터 흔적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배도사  대피소


"배도사(裵道士) 대피소" 이름의 내력

"배도사 대피소"는 83년경에 지어졌다고 한다.
당시에는 조계산을 찾는 등산객이 휴일에도 수십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날이 늘어나는 등산객의 안전을 위하여 첩첩산중인 이곳에 대피소를 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이름없이 대피소 라고만 하였다.

1969년경 광주일고 고교생 여러명이 폭설에 길을 잃어 조난사고로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대피소가 들어선 이듬해 초여름 어느 날, 긴머리 수염에, 훤칠한 체격, 낡은 작업복 차림에 고무신을 신은 기인이 이곳 대피소를 찾아와 안식처 삼아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가 가진 것 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낮이면 산속으로 들어갔고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먹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사람이라곤 가끔식 마주치는 공원순찰 관리인과 "지경터"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조계산 보리밥집 "최석두"씨 부부 정도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최씨 부부와 산중의 이웃으로 조금씩 가까워진 그는 끼니를 같이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말없는 그의 기행이 조금씩 엿보였다.

그의 개인적인 신상은 도저히 알 수 없었으나 카투사 출신이었다고 한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여 간혹 지나가는 외국인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하였다.  언제부턴가 오후가 되면 "배바위" 근처로 올라가서 밤을 보내는 날이 늘어갔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도를 닦는 것이라고 여겼다. 훗날, 그곳은 추운 겨울을 보내기에 적당한 토굴 생활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추측 했다.

산을 찾는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때는 풍수와 사주를 말하기도 하고, 대피소 옆 계곡물을 막아  피래미들이 노니는 모습을 즐기기도 하는 그의 성이 裵씨 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배도사"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대피소도 자연스레 "배도사 대피소"라고 부르게 되었다. 

배도사의 기행이 5~6년쯤 되었을 때 그의 제자가 되기를 자처하는 한 젊은이가 찾아와  제자를 거느린 어엿한 도사가 되어 이후로도 한동안 대피소 생활을 계속한 그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뒤 영영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를 기억하는 조계산 보리밥집 최씨 부부는 그가 만든 대피소 옆 계곡물에서 노니는  피래미를 보며 "양놈들은 원더풀 뷰티풀을 반복하는데 누구네(?)는 매운탕 하면 좋겠다~~." 라고 말하던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

(조계산인 요산 점수생의 글중에서...)




조계산 보리밥집

드디어 보리밥집에 도착했다.
정확히 오후 3시 이다.
허기진 배를 채울 겸 주방 평상에 걸터 앉았다.




보리밥이다.
야채와 배추국 등 순박하고 조촐한 밥상이지만 허기진 나에게는 군침이 돈다.

앞서 먹은 것 이라고는 김포공항 탑승장에서 8시발 비행기에 탑승전 먹은 우동 한 그릇과
산을 오르며 먹은 연양갱과 초코렛이 전부이다.

최씨 부부 젊은 딸이 주방옆 하우스 식당으로
안내했지만 주방에 눌러앉아 먹었다.

도시로 나가지 않고 부모님을 돕는 딸이 이쁘다.




막걸리 반주전자도 주문했다.
쥑인다.
토탈 9천냥이다.




보리밥집 전경

예쁜 아가씨에게 계산하며 물으니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한다.
최씨 부부 딸임에 틀림없다.

맛있게 먹은 나에게 따끈한 숭늉 한 그릇도 내어준다.
푸근한 인심을 느낀다.

이쁜 딸!  멋진 청년 만나기를 바란다.




보리밥집을 나서니 다시 오르막이다.
이정표를 보고 가장 거리가 짧은 "큰굴목재" 길을 택했다.

그러나 오르막에 오르려는 순간 다리에 이상한 증세를 느꼈다.
발목을 높이 들려니 부자연스럽다. 생전 처음있는 현상이다.
배낭을 내리고 가벼운 운동으로 풀었다.




계곡사이 다리이다.
제법 계곡이 깊다.




다리에서 바라 본 정상쪽 계곡




"큰굴목재" 오르는 길
잘 정비되어 있으나 내 다리가 불편하다.
쉬엄쉬엄 올랐다.




" 큰굴목재" 정상
여기도 정상으로 오르는 이정표가 있다.
시야가 좋은 곳으로 올라가 보았다.




비바람에 세월을 머금은 나무들.
떠나기 전, 어제 뉴스에 황사주의보가 있었다.
다행히 황사는 아닌 것 같으나 시야 확보가 안된다.





내려가는 길목에 간혹 눈에 띈다.
뭔 꽃인지 모르겠으나
바위틈, 낙엽사이 간간히 흩어져 핀 꽃에 시선이 끌린다.




호랑이 턱걸이 바위


"호랑이 턱걸이 바위"의 전설

이곳의 절벽처럼 생긴 바위를 아랫마을 사람들은 "호랑이 턱걸이 바위"라 부른다. 옛날 이 바위에는 항상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목을 걸치고 엎드려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이 녀석은 사람들의 심성을 꿰뚫어 보는 영물이어서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구별할 줄 아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이 호랑이가 자리를 지키고 잇을 때 자비로운 스님이나 착한 사람이 올라오면 안심하고 지나가도록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주었고  만약 마음과 행실이 악한 사람이 지나가려고 할라치면 길을 피해주지 않을 뿐 아니라 해치려고 하여, 하는 수 없이 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이 호랑이를 산신령이라고 불렀으며 마음씨 나쁜 사람들은 이 길로 지나갈 엄두도 내지 못했고 호랑이가 턱을 내밀고(걸치고) 있는 바위라 하여 "호랑이 턱걸이 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계산인 요산 점수생의 글중에서...)




산을 내려 갈수록 계곡물은 점점 많아지고
소리도 우렁차다.

이무렵,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않은 젊은 아가씨 둘이 카메라 달랑들고
벌써 지친듯한 모습으로 산을 오른다.

목적지를 물으니 송광사라 한다.
이때가 오후 4시경.
송광사 끝자락에서 출발한지 3시간이 경과했다.

지나온 길과 소요시간을 설명해 주고
무리하지 말것을 당부해 주었다.

산중에는 일찍 저물기 때문에 자칫 위험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오늘 산중에는 인적이 드물기도 했다.




계곡을 거의 내려오니 편백나무 군락이 나타난다.
그리고 앞에는 시야가 트이며 가꾸어진 풍경이 펼쳐진다.
선암사에 다다른것 같다.






이곳이 뭔곳인지 모르고 몇컷 남겼다.
오두막을 배경으로  홀로 핀 진달래를 사진에 담았다.
여느 산처럼 조계산에서 진달래 군락을 목격할 수가 없다. 




편백나무 군락에 들어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내려와 보니 조계산 생태학습장이다.
다 내려왔다.

저쪽으로 선암사 끝자락이 어렴풋이 보인다. 


계속.....(선암사와 600년 선암매)

황소생각의 하늘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