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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행, 맛집 이야기

설날을 보내며 느림의 미학, 슬로시티를 생각한다.


설날을 보내며 느림의 미학,  슬로시티를 생각한다.

 

요즘들어 느림의 미학에 대해서 많이 회자되는 것 같다.
대표적으로 소개되는 지역이 제주의 올레길, 슬로시티 완도군의 청산도, 신안군 증도,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의 삼지천 한옥지구 등이알려지고 있다. 그외 지역으로 지리산 옛길, 문경새재길도 요즈음 부각되는 것 같다.

사실 2000년도 부터 나는 매년 봄이면 아내와 함께 문경새재길을 맨발로 걸었다.  제1관문에서 제3관문까지 약6.5Km 구간은 맨발로 걷기에 적당한 코스이다.

봄날 파릇한 새싹으로 푸르른 숲사이 길과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 것을 즐겨왔다.

2관문 인근의 주막에서 계곡물에 발 담그고 파전과 도토리묵을 안주삼아 마시는 막걸리는 그 맛도 일품이려니와 신선이 따로 없다.

그러나 그때에는 느림의 미학을 깨닫지 못했다.
다만 건강을 생각하며 맨발로 걸었고,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을 벗삼아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사실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휴식이 되었고 한동안 다시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에너지가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작년 가을 제주 올레길과, 청산도, 보길도를 걸으며 길가의 잡초마저 새롭게 보이는 자신을 발견했다.

 (계절별로 다양한 얼굴의 문경새재길)


년말 년시와 민족 최대명절인 설날을 보내며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을 새삼 피부 깊숙이 느낀다.

시간이 좀처럼 가지 않던 어린시절과 다르게 언제부터인가는 참 빨리도 흘러간다.
죽을 운명에 놓인 인간은 누구나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지라,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을 잡아보려고 무던 애를 쓴다.

돈을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시간은 돈"이라고도 한다.
한때 "초관리 운동"이 생산성 향상의 모범사례로 널리 소개되기도 했다.


시간을 절약해 주는 자동차, 휴대전화, 컴퓨터, 전기밥솥, 인터넷 등이 하루가 멀다하고 그 기능을 향상시키고 있다. 이러한 문명의 이기들을 소유하고 있는 현대인들은 그것을 사용하지 않던 세대보다 훨씬 더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야 마땅하다.

그러나 최첨단의 기기를 사용하는 현대인들은 과연 더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가?

현대인들은 역사상 가장 행복한가?

실상은 정반대이다. 현대인들은 역사상 가장 바쁘게 살아간다.
행복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느낄 여유마저 없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최첨단의 상품들은 더욱 새로운 기능을 담고, 더욱 비싼 값으로 팔린다.
최신의 기술이 채용되어, 나의 삶을 더 풍요롭게 꾸미고, 시간도 절약하게 해주는 상품을 구입하려면 지금의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시간은 돈이므로 열심히 일을 해서 신상품을 손에 쥐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은 시간이 없다.
 
그런데 신상품을 손에 쥐고 나면 또 다른 좋은 신상품이 광고에 등장한다. 그것을 부러워한다.

또 그것을 구입하려고 열심히 일한다.

시간이 없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은 경제적으로나 역사상 가장 가난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 자본주의 산업구조는 새로운 기술로 대량의 이익을 남기고자 대량생산을 하고, 광고 매체를 통해 대량의 소비를 부추켜 대량 폐기물을 양산하는 필연적으로 반환경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자원의 낭비뿐 아니라 인간의 빠른 삶을 위해 자연은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고 있는가?

빠른 삶을 살려고 하는 이들에게 산과 강은 아름다움의 대상이 아니라 장애물일 뿐이다.
그리하여 산과 강을 따라 굽이굽이 곡선으로 아름답던 길들은 직선화되고, 흉물스런 교량과 터널로 강과 산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야생동물들은 서식처를 잃고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에 죽임을 당하기(Road Kill) 일쑤이다. 
인간의 잘못된 욕망은 인간에게도 자연에게도 큰 불행을 안겨주고 있다.

느림으로 돌아가는 운동!

빠름이 인간의 바쁨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느림이 해답이다.
느리다는 것이 나태하다는 뜻은 아니다.
느림은 자연의 속도를 말한다.

자연은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싹을 틔우고 열매맺고 땅에 떨어지기 까지 자연은 순리에 따라 너무 느려서 그 움직임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반드시 변화를 이루어낸다. 그런 자연에 순응하고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느림의 생활양식이다. 느림의 삶은 자연과 사람, 곧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의 소중함을 발견하게 해주고 서로의 배려를 통해 관계를 회복하게 해준다. 

1998년 일본의 문화인류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쓰지 신이치는 "슬로라이프(Slow Life)운동"을 전개 하였다.
삶의 속도를 줄이고 친환경적이고 지속가능하며 세계화에 맞서는 삶의 방식, 경제적 관점으로만 바라보던 시간의 틀을 깨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속도를 지향하는 운동이다.

1999년 이탈리아 중북부의 아주 작은 도시 사투리니(Palo Saturini)는 다른 도시(오르비에토, 브라, 포시타노) 의 시장들과 함께 느린 도시(Slow City)를 만드는 모임을 조직했다.
 
슬로시티 운동은 느림과 여유를 지향하며 지역의 전통과 문화를 보호하고 삶의 속도를 이완하며 축제와 환대의 문화를 되찾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패스트푸드(Fast Food)에 대한 반작용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1980년대 중반에 일어난 슬로푸드 (Slow Food) 운동을 기반으로 한다. 세계화에 반대하여 지역이 가진 본래 자연환경과 고유음식, 전통문화, 시간, 계절, 우리 자신등을 존중하며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삶을 운동의 목적으로 한다.

이탈리아의 오르비에토는 국제 슬로시티 사무소가 있는 곳으로 슬로시티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다.

오르비에토는 바위산 위에 세워져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중세 도시이다.

도시로 가는 자동차 길이 있지만, 자동차 출입을 제한하고 산 아래 마을 입구에서 대중교통인 푸니쿨라(산악열차)나 전기(수소)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마을에는 패스트푸드 식당이나 슈퍼마켓을 들어올 수 없다.

대신에 매주 두 번씩 열리는 재래시장에서 신선한 농산물을 구입한다. 또한 방부제 없이 매일 구워내는 빵집과 수공예 상점들이 가득하다. 대부분의 상점이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문을 닫는데, 여유롭게 점심식사를 즐기고 휴식을 취하기 위함이다.
 

저녁이 되면 사람들이 시청앞 광장에 모여 환담을 나눈다. 현대화 되면서 사라진 이탈리아의 여유로운 광장 문화를 되찾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슬로시티들이 도시 어디에나 있는 광장을 통해 전통적인 먹을거리를 나누고 축제를 즐기는 장소로 부활한 것이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 가끔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고 한다.말이 너무 빨리달려 혹시 쫓아오지 못하는 자신의 영혼을 기다리기 위함이라고 한다. 바쁜 삶은 영혼이 없이 사는 것이다. 

우리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통해, 빠름이 선이라는 공식을 당연시하며 살아왔다. 
그것이 우리나라를 초고속으로 발전하는데 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경제는 성장했을지 몰라도 더 소중한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문화, 자연과 인간관계의 단절이라는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싹이트고 자라는 것이 보이지는 않지만 우주는 그렇게 서서히 성장해 나간다.


우리 마음 속에 영혼이 숨 쉬고 자라게 하려면 느림의 미학을 깨달아야 한다.

느림을 되찾는 운동들은 자연의 리듬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게 해 준다.
전통을 소중히 여김으로서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있는 문화를 통해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며 생태적으로 건전한 삶을 추구할 수 있지 않을까?

슬로시티는 우리가 살아가는 필요조건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