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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행, 맛집 이야기

고산 윤선도가 꿈꾸는 낙원 "보길도와 세연정 원림(園林)"

보길도 여행  마무리 포스트

윤선도는 (1587(선조 20)~1671(현종 12)) 서울에서 태어나 26세에 진사에 급제한 후 유배와 관직에 등용되기를 거듭했다.  인조 때에는 송시열과 함께 봉림(나중에 효종이 된다), 인평대군의 스승이 됐다.  그러다가 모함에 의해 좌천되어 1635년에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온다.
 

그후 고산이 쉰 살이 되던 해(1636년)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고, 왕의 가족은 강화도로 피신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고산은 집안의 노복들을 데리고 강화도로 가지만, 결국 인조는 청나라에게 항복하고 만다.  그 때 윤선도는 다시는 세상을 보지 않으려는 결심으로 뱃머리를 탐라(耽羅)로 향했다.  그 뱃길에서 풍랑을 만나 피하고자 닻을 내리 곳이 보길도 황원포이다.  수려한 산세와 맑고 깨끗한 풍경에 매료된 그는 가는 길을 멈추고 이곳에 머물기로 한다.

그 때의 감격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늘이 나를 기다려 이곳에 멈추게 한 것이다.”- 윤위 <보길도지>에서

세연(洗然)이란 물에 씻은 듯이 맑고 깨끗한 풍경이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라는 뜻이다.
윤선도가 1637년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 때 지은 정자다.
널판지로 만든 문이 사방으로 달려 있는 건물이다. 그 문을 모두 들어올려 처마에 걸어 놓았다.
청정한 계담(溪潭)과 장송(長松), 그리고 싱싱하게 이파리를 달고 있는 상록수림이 정자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 풍경들이 정자 속으로 밀려 온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거처를 마련하기로 작정한 것은 시원하게 펼쳐진 들과 계곡에 가득한 숲, 특히 유자, 산다, 석란, 석류와 오래 된 동백나무, 그리고 맑은 계류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지만, 그것보다는 지기(地氣)가 청숙(淸淑)했기 때문이다.  그가 거처로 마련한 낙서재(樂書齋) 주위는 ‘사방이 산으로 빙 둘러싸여 있고  푸른 아지랑이가 어른거리고 무수한 산봉우리들이 겹겹이 벌려 있는 것이 마치 반쯤 핀 연꽃’과도 같은 형국이다.  그래서 그 곳을 부용동(芙蓉洞)이라고 명명했다.  그곳은 풍수적인 의미로는 명당이며 윤선도의 낙원이다.
 

윤선도는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승보시, 향시, 1612년(광해군 4년)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였다.  71세까지 활동하여 벼슬이 의금부 도사, 공조좌랑, 예조정랑, 예조참의,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며, 남인의 거두로서 치열한 당쟁 속에 휘말려 서인(西人) 송시열에게 정치적으로 패해 유배생활을 시작으로 세 차례에 걸쳐 일생을 거의 벽지 유배소에서 보냈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를 가림에 타협이 없어 자주 유배를 당한 반면,  음악을 좋아하는 풍류인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남긴 시조 75수는 국문학사상 시조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진다. 보길도로 돌아와 정자를 짓고 시(詩)·가(歌)·무(舞)를 즐기며 살았으며, 효종이 즉위한 이래 여러 차례 부름이 있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오랜 유배생활과 타협을 모르는 윤선도에게  보길도는 그가 꿈꾸는 낙원인지 모를 일이다.


세연정과 세연지
세연지는 계류를 막아 만든 못이다. 이 못은 수제선(水際線·물과 육지가 만나는 부분)의 처리가 일품이다.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바위 주위는 직선으로, 그리고 물과 만나는 산기슭은 자연스런 곡선의 호안으로 마감하여 어디서든지 정원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없도록 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한 겹 한 겹 베일을 벗듯이 정원의 속살이 드러나는 이 세연지를 안압지와 함께  우리나라 정원 풍경의 명품으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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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석보와 동대
판석보는 물막이 석보(石洑)다. 높이 1m의 판석(널판지처럼 얇고 넓은 돌)을 폭 2.5m로 세우고 그 속에 강회를 넣어 물이 새지 못하게 한 후 1.2~2.4m의 판석으로 뚜껑을 닫듯이 머릿돌을 올려놓았다. 정원학자 정재훈도 이것을 우리나라 조원 유적 중 유일한 석조보라고 하였다.
동대는 세연정에서 바라보아 판석보 오른쪽에 위치해 있고 가로 6.7m 세로 7.5m 의 장방형으로 높이는 약 1.5m 이며 자연석으로 쌓았다. 어부사시사가 불리워지면 여러 사람이 군무를 즐겼던 곳이다. 맞은 편이 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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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지의 바위
크고 작은 바위가 수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 바위들을 칠암이라고 한다. 고산은 칠암이 보이는 정자의 서쪽에 칠암헌(七岩軒)이라는 편액을 내걸었다.  윤선도는 산란기에 송어나 은어가 올라오면 이 바위에서 낚시를 하기도 하고 옥소대쪽으로 활쏘기를 했다.

윤선도의 5대손 윤위(尹偉)가 쓴 <보길도지(甫吉島識)>에 따르면 이 정원을 사용한 것은 청화(淸和)한 날이라고 한다. 악기 소리가 은은히 퍼지는 가운데 동, 서대와 옥소대에서 긴 소매의 무희에게 춤을 추게 하고는 이 모습이 수면에 비치는 광경을 정자에서 바라보았다. 또 남자아이에게 채색 옷을 입혀 배에 태우고 그가 지은 어부사시가 를 부르게 하며 이 계담을 돌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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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수담(回水潭)
세연정 동쪽 축단 밑의 계담에서 인공연못으로 흘러드는 터널식 수입구가 있다. 계담쪽에서 물이 들어가는 수구는 다섯 구멍이며 인공 연못쪽으로 나오는 수구는 세구멍이다. 이를 五入三出 이라 하는데 이 구조는 아주 톡특한데 물막이 석축에 다섯곳의 흡수구를 만들어 흐르는 물을 받아 들이되 배출하는 구멍은 세곳만 만들어 들어오고 나가는 수량을 조절하는 구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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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윤선도가 65세(1651년,효종 2) 때 벼슬을 그만두고 전라남도 보길도 부용동에 들어가 한적한 나날을 보내면서 지은 노래이다. 세상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자연과 한몸이 되어 강호한정(江湖閑情)에 빠지는 것이 주제이다. 4계절을 각 10수씩 40수로 하고 여음이 붙어 있다. 여음은 배를 띄우는 것에서부터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따라 말을 붙였다.

  사계절 40수 본문 및 해설  http://www.kanggo.net/~pooh/munhak/sijo/ga/abusasi.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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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정 가는 길목에 세워진 어부사시사)


황소생각의 하늘사랑